셀리악병, NCGS 등 글루텐으로 인한 질환 대두 … 국내 관련 유전자 적어 ‘공포증’ 과장, 무작정 ‘글루텐 프리’ 식단 도리어 위험
지난달 말 영국 일간지 ‘더 선’은 밀가루에 포함된 글루텐이 면역체계에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켜 심할 경우 뇌의 일부를 손상시키는 ‘글루텐운동실조증(Gluten ataxia)’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는 일부 특이한 경우에 국한되는 일이며 일반적인 성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그었다.
글루텐이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 계속 이어져 오면서 국내에서도 글루텐을 회피하는 ‘글루텐 프리’ 식단 등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근거 없는 ‘글루텐 공포증’이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글루텐 운동실조증은 글루텐을 분해할 때 분비되는 항체가 비정상적으로 뇌의 일부, 그 중에서도 운동조절 능력을 관장하는 소뇌를 공격해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소뇌는 신체 균형, 말하기, 자세, 걷기, 달리기와 같은 운동활동을 담당하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발생 기전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통 만성소화장애를 겪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걸릴 확률이 16배 높으며 유전적인 영향도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증상은 복부통증, 팽만감, 가스, 설사, 변비, 구토 등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에는 글루텐 프리 식단을 적용하는 것만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대부분 질환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상당히 진행된 후 병원을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이 같은 보도가 국내에도 전해지면서 맘카페 등에서는 글루텐 프리 식단에 대한 문의가 급증하는 등 글루텐 공포심이 부각되고 있다.
글루텐 과민증 전 인류의 약 10% … 셀리악병, NCGS 등 대표적
글루텐은 대부분의 곡물에서 발견되는 단백질이다. 불용성으로 빵, 파스타, 국수 등을 먹을 때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글루텐 덕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글루텐이 장 염증을 유발하고 각종 질환을 부를 수 있다는 유해성 논란이 일어나며 글루텐을 멀리는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글루텐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밀, 보리, 호밀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콩, 옥수수, 메밀, 쌀, 퀴노아 속의 글루텐은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루텐의 문제는 글루텐 불내증(Gluten intolerance)과 연관돼 있다. 글루텐이 든 빵, 케이크, 시리얼, 파스타 등을 섭취한 후 복부통증, 설사, 발진, 두드러기, 배 더부룩함 등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한다. 글루텐 과민증 (Gluten Sensitivity)이라고 불린다.
이런 이들이 글루텐을 섭취하면 위와 장에서 완전히 분해·흡수되지 않은 글루텐이 소장에 남아 장 점막의 면역체계를 자극하고 염증을 유발한다. 이로 인해 소화기질환, 자가면역질환, 천식, 비염, 두통, 피부발진, 대사증후군 등이 발병할 수 있다.
이런 글루텐 과민증은 전 인류의 약 10%에서 나타난다고 추정된다. 이들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질환은 '셀리악병'(celiac disease)이다. 소장에서 일어나는 알레르기질환으로, 글루텐에 의한 염증이 반복되면서 소장의 융모가 소실되는데 이 때문에 영양소가 흡수되지 않으면서 빈혈, 다발성신경염, 설염 등이 생긴다. 국내에는 드물지만 미국·유럽에서는 113명당 1명꼴로 발병한다.
‘비셀리악 글루텐 과민증(Non Celiac Gluten Sensitivity, NCGS)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글루텐 불내증의 하나다. 소장 조직에 손상이 없더라도 복통, 팽만감, 설사, 변비, 발진, 두통, 현기증, 우울감 등 복부 질환과 관련된 일부 징후 및 증상을 유발한다.
문제 유전자 국내서 5% 미만, 심리적인 ‘노세보 효과’ 반박도 … 글루텐 아닌 ‘포드맵’이 문제 주장
하지만 글루텐의 유해성이 과장됐다는 주장도 많다. 글루텐이 함유된 대표적인 식품이 밀, 보리, 호밀 등은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섭취한 식품이자 지금도 전 인류의 3분의 2가 주식으로 삼고 있는 만큼 안전성이 높다는 것이다. 글루텐과민증, 글루텐실조증 등 글루텐으로 인한 문제는 극히 일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다.
특히 국내의 경우 글루텐에 의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서양에 비해 더 낮기 때문에 글루텐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2014년 9월 29일 한국식품커뮤니케이션포럼에서 주최한 ‘글루텐 바로 보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에 의하면 한국인 중 셀리악병 유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5%미만, 한국인의 셀리악병 확진 사례 1건 등으로 서양에 비해 발생 확률이 극히 낮았다.
즉 일부 알레르기나 유전적 결함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고 글루텐으로 문제가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셀리악병을 제외한 NCGS의 상당수가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주장했다. 노세보는 위약(placebo)을 뜻하는 플라시보의 반대 개념으로 심리학적으로 부정적인 예감으로 약효가 나지 않거나 실제 병이 생기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언론이나 소문에 의해 부추겨진 글루텐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심리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르민 알레디니(Armin Alaedini) 미국 컬럼비아대 면역내과 교수가 셀리악병이 아닌 글루텐 민감성 환자 80여명을 혈액을 모아 조사한 결과 대다수가 글루텐에 대한 높은 항체 수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즉 글루텐으로 속이 불편한 사람은 실제로 항체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중 20명을 대상으로 글루텐 프리 식단을 6개월간 진행한 후 재 검사를 실시하자 항체 수치는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문제가 글루텐 등의 곡물 단백질이 아니라 곡물의 특정 탄수화물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피터 깁슨(Peter R Gibson) 호주 모나쉬대 의대 소화기내과 교수는 NCGS 환자의 대다수는 글루텐(단백질)이 아닌 탄수화물에 의해 소화적 문제를 겪는다며 원인 물질에 대해 포드맵(FODMAP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드맵은 ‘발효가 되는 올리고당 류, 이당류, 단당류 및 폴리올(fermentable oligosaccharides, disaccharides,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의 머리글자다. 식이 탄수화물의 일종으로 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고 남아서 발효되는 특정 당 성분을 가리킨다. 예컨대 올리고당(프룩탄 fructan, 갈락탄 gallactan), 이당류(유당), 단당류(과당), 폴리올(당알코올)을 말한다.
FODMAPs는 대부분 대장에 남아 수분을 머금어 설사를 유발한다. 또 장내 미생물에 의해 발효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가스가 복부 팽만을 촉진한다. 대표적인 식품으로는 사과, 복숭아, 콩류, 양배추, 생마늘, 치즈 등이 있다. 밀의 탄수화물인 프룩탄도 포드맵이다.
정은진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밀가루 음식을 먹고 소화가 안된다는 이들의 경우 글루텐이 아닌 포드맵에 의한 복부 증상이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셀리악병 등이 의심되는 소화기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소화기내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고, 혈액검사로 글루텐 항체 단백질의 수치 상승 여부를 파악하고, 백혈구 항원(HLA-DQ2, HLA DQ-8)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루텐 프리 식단이 건강‧다이어트에 도움? … 설탕‧지방 많아 비만 유발, 영양소 불균형 초래
글루텐의 유해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글루텐을 제거한 글루텐 프리 식단은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글루텐 불내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소화기 증상의 완화 및 치료를 위해 개발됐지만 최근에는 일반인들이 건강 혹은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글루텐 프리 식단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전문가와 상의 없이 진행하는 글루텐 프리 식단은 도리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다이어트 목적으로는 더욱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2017년, 스페인 식품연구소는 빵, 파스타, 과자, 시리얼 등 대표적인 글루텐 프리 식품 654종과 글루텐이 포함된 동일 종류의 일반 식품 654종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글루텐 성분을 넣지 않은 '글루텐 프리' 식품이 오히려 비만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은진 교수는 “글루텐이 함유된 피자, 빵, 햄버거 등의 식품이 체중을 증가시키기 떄문에 체중 증가의 원인이 글루텐에 있다고 오인하기 쉽다”며 “하지만 이들 식품이 체중 증가를 야기하는 것은 열량 및 지방 함량이 높기 때문이어서 글루텐이 없는 식단을 선택하는 것보다 음식 성분 및 영양 성분에 주의를 기울여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글루텐 프리 제품들은 일반 제품에 비해 설탕과 지방을 더 많이 첨가하므로 상대적으로 열량과 지방 함량은 높고 섬유소는 적어 오히려 체중 증가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영양학회 논문에서는 글루텐 프리 다이어트가 체중감량에 도움이 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밝혔다. 과체중 및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글루텐 프리 식사를 진행한 다른 연구들에서도 체중이 감소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전문가들은 체중 감량을 위한 글루텐 프리 식사만을 고집한다면 오히려 체중이 감소하지 않고 영양의 균형이 깨진 식단으로 건강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루텐 프리 식사는 탄수화물, 철, 칼슘, 티아민, 리보플라빈, 나이아신, 엽산 등의 영양소 부족으로 이어지기 쉽다. 또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품은 대부분이 글루텐을 함유하고 있어 글루텐을 피하면 섬유소 섭취도 같이 줄어 변비가 생길 수도 있다.
특히 밀에 존재하는 발효성 식이섬유 올리고프락토스(oligofructose)와 이눌린(inulin)은 장내 유익한 박테리아의 생성에 도움이 되는데, 글루텐 프리 식사가 지속되면 잠정적으로 이러한 박테리아의 양이 감소돼 면역체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은진 교수는 “국내는 글루텐 관련 질환이 있는 환자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글루텐 공포’를 가질 필요는 없다”며 “다만 글루텐 및 그 유발 질환에 대한 국내외 연구 결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건강한 식단을 꾸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