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의 일인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5일 별세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5개월 만이다. 향년 78세.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그는 생전에 폐암 수술을 받았고, 폐렴 등으로 여러 차례 입원치료한 경험이 있다. 희귀병인 ‘샤르코마리투스’를 가계 유전질환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 실신 … 스텐트시술‧저온치료로 회복했지만 ‘최소의식상태’ 유지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것은 2014년 5월 10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다. 밤 9시경 늦은 저녁을 먹은 그는 “속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2시간 불편감을 호소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호흡이 멈추고 맥박도 거의 잡히지 않은 긴급상황으로 악화돼 비서진들은 그를 주치의가 있는 삼성서울병원 대신 자택에서 가까운 순천향대 서울병원으로 이송했다.
진단명은 급성심근경색. 혈전이 심장으로 통하는 혈관을 막아 혈액공급이 차단되면서 심장조직이 괴사하는 질환으로 국내 돌연사 원인의 약80%를 차지하며 발견 즉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사망률이 30~40%에 달한다.
이 회장은 순천향대병원에서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받고 호흡과 맥박을 회복했다. 2시간 후 새벽 1시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삽입술’과 혈전을 녹이는 약물치료를 받았다.
이후 이 회장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돼 12일 오전 8시 30분경 에크모(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or. 체외막산소공급장치)도 제거했다. 당시 삼성그룹 측은 “이 회장의 자가호흡은 돌아왔지만 저체온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깊은 수면상태(deep sedation)'에 빠져 있고, 이 과정이 지난 뒤 정상체온을 회복하면 수면상태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체온치료는 체온을 낮춰 세포대사를 제한해 뇌조직 손상을 최소화하는 치료법이다. 심장마비 등으로 뇌가 3~5분간 산소공급을 받지 못할 경우 치명적인 뇌손상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체온을 낮추면 뇌의 에너지 대사뿐만 아니라 세포수준에서의 2차 신호전달체계의 활성도가 떨어져 뇌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원리는 심부(深部)체온을 낮춰 뇌대사 및 뇌속 혈류요구량을 줄이고, 심장정지 상태에서 생긴 독성물질(활성산소와 염증성 사이토카인 등)로 인한 뇌내 염증·뇌부종·뇌손상 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체온치료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심기능 회복 후 수반되는 인지기능 저하나 혼수상태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갑작스런 수혈로 인한 독성물질의 피해를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당시 삼성서울병원 측은 다음날인 13일 의식을 회복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결국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1주일 후 20일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는 자가호흡은 가능하지만 주변의 사람을 알아보거나 소리 등이 반응하지는 못하는 ‘최소 의식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6년 5개월 동안 삼성서울병원 20층의 VIP병동에서 재활치료를 받아왔다.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오가는 '운동치료'와 소리나 자극을 주는 '자극요법'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철저하게 외부 통제를 해 이따금 그의 사망설이 증권가를 떠돌았다.
따라서 25일 별세는 심혈관질환의 후유증 장기화로 심장기능이 떨어져 심근경색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7세 폐암 발병 후 종종 폐질환으로 입원 … 부친‧형‧여동생 모두 폐암 가족력
그가 가진 지병 중 대표적인 것은 폐암이다. 이 회장은 57세였던 1999년에 폐부근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았다. 당시 쇄골밑 림프절에서 선암세포가 발견됐고 림프절이 확대된 증상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술 후 그는 춥고 건조한 겨울에는 되도록 따뜻한 곳에 머물라는 주치의의 권유로 일년 중 상당 기간을 미국 하와이나 일본 오키나와처럼 기후가 따뜻한 지역에 거주하며 원거리 경영을 이어나갔다.
폐암은 그의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큰형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생전에 투병했던 질환이다. 1987년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폐암으로 사망했다. 3형제 중 장남인 이맹희 전 회장도 폐암으로 2012년 말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고 2015년 8월 중국에서 별세했다. 차남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그룹 회장은 1991년 58세의 나이에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폐암을 앓은 후 폐기관이 약해진 탓인지 고 이건희 회장은 이후 폐질환이 종종 발생했는데 2009년에는 기관지염으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나흘간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며, 쓰러지기 1년 전인 2013년 8월에는 감기가 폐렴 증상으로 발전해 열흘 정도 같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희귀 유전질환 ‘샤르코마리투스병’ … 기도흡인으로 폐질환 유발, 심장에도 무리
삼성 일가에서 내려오는 희귀 유전병인 ‘샤르코마리투스병’( Charcot-Marie-Tooth disease)도 일생 그를 괴롭힌 지병이다. 운동신경 및 감각신경과 관련한 유전자의 이상으로 발병하며, 발에서 시작해 사지의 근육이 위축되고 근력이 떨어지는 게 주요 증상이다. 질병이 진행하면서 손과 발모양이 아치형으로 변형돼 흡사 까마귀발 모양처럼 보이기도 한다.
증상은 보통 청소년기나 이른 성년기에 시작되지만 드물게 중년기에 나타날 수 있다. 진행됨에 따라 사지의 근육이 줄어들어 정상적인 운동기능이 떨어지고 통증에 대한 감각도 줄어들게 된다. 증상은 유전자돌연변이의 종류에 따라 매우 경미한 수준에서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정도까지 다양하다.
2500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는데 보통 50%의 확률로 유전된다. 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배우자 박두을 집안 쪽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CJ 이재현 회장과 그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 이재현 회장의 아들 이선호 씨 등이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각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샤르코마리투스병으로 목 근육이 약해져 기도흡인(식도 근육의 이상으로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는 증상)이 자주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폐질환이 자주 유발됐고 결국 심장에까지 무리를 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폐의 기능이 약해져 호흡이 원활하지 않을수록 심장이 받는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샤르코마리투스병은 현재까지 확실한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은 불치병으로 무중력치료, 전기‧수중치료 등으로 근육의 퇴행 속도를 늦추는 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