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에 감염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에 ‘VIP 신드롬’에 다시금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식 병명은 아니지만 환자의 유명세 또는 지위에 의해 의학적인 치료결정이나 결과가 영향을 받게 되는 상황을 VIP신드롬이라고 칭한다.
이른바 ‘특별대우’ 때문에 오히려 치료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아 생긴 말이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은어처럼 쓰이기도 하고 징크스로 여겨지기도 한다. 정신과 의사처럼 환자-의사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VIP신드롬은 비단 권력자, 재력가, 탤런트, 유명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충분히 겪을 수 있다. 어렵사리 명망 있는 의사를 소개받아 찾아갔는데 의사가 소개해준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의식해 열심히 치료하려다가 오히려 ‘의료사고’에 가까운 실수를 저질러 환자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그렇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부탁하지 않으면 의료진이 관심을 덜 가지거나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이 VIP 신드롬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신뢰할 의사를 찾는 것은 절체절명의 중요한 일이다. 고지식하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여러 방법을 통해 의사와 확실한 관계를 맺고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껴지는 게 일반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과거에 불친절하고 무책임한 의사를 만나 치료에 불편을 겪은 상처가 있다면 더욱 이런 경향이 강해진다.
환자 측면에선 ‘부작용’ ‘의료사고’ … 의사 입장에선 “환자 편의 봐주다 제대로 치료 못한 것”
윤세창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VIP신드롬은 종종 환자 자신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며 “가장 큰 문제는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신속한 치료를 최우선으로 여기다가 응급실에서 필수적인 초기 선별검사들을 VIP에겐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가 진찰을 할 때도 VIP 환자가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할 것 같으면 문진이나 신체검사를 건너뛰게 된다. 하지만 이는 진단과 치료에서 중요한 단서를 놓쳐 자칫 제대로 된 치료를 못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남들은 며칠이 걸려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검사들을 어떻게 해서든 하루에 다 끝내려 무리하게 일정을 잡게 되면 검사자는 피로해 명확한 판독을 못하게 될 수 도 있고, 환자도 바쁘게 끌려다니다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수술 후 통증을 없애기 위해 진통제를 적극적으로 투여하다가 뜻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는 것과 같은 일도 생긴다. 한편으로는 특별대우가 지나쳐 환자가 오히려 불편해할 수 있다.
의사들 “객관성 상실하는 경우 있어 오히려 일 그르치게 돼”
의료진도 VIP환자가 부담스럽다. 환자의 유명세, 지위, 권력 또는 환자와의 친분 때문에 의학적인 객관성을 상실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실수할까봐 두려워 너무 잘하려 애쓰다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2018년 배우 한예슬의 의료사고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수술을 집도한 강남차병원의 성형외과 의사가 유명인인 환자의 지방종 흉터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려운 수술 방법을 시도했다가 실수해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역사적으로 VIP신드롬을 보인 의사로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오도르 모렐을 꼽을 수 있다. 모렐은 히틀러를 치료한다며 필로폰 등 마약과 남성성 강화를 위한 비전통적인 치료법을 남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입원해 길리어드의 항바이러스제 ‘렘데시비르’, 리제네론의 중화항체 치료제 ‘REGN-COV2’, 스테로이드제인 덱사메타손 등 코로나19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거의 모든 약물을 투여받았다.
특히 ‘Regn-COV2’는 임상 3상을 진행 중인 시판도 되지 않은 약물이다. 현재까지 임상시험에서 수백 명의 환자에게만 투여됐으며 아직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긴급사용승인조차 받지 못했다.
덱사메타손은 투여 4주후 사망률을 17% 낮춘다는 임상결과에 힘입어 지난 6월 영국에서 코로나19 치료제로 승인됐으나, 세계보건기구(WHO)는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 이 약물을 투여받았을 때 사망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렘데시비르도 중증 환자에게만 투여되는 약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5월 중증 환자에 한해서만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아직 정식 승인은 아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안전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3개나 투여받은 셈이다. 미국 언론들은 70세가 넘은 고령에 비만 등 기저질환이 있어 위험한 상태에서 기존 표준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이런 치료를 받았다고 관측했다. 일각에서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가 보행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지만 과했다는 시각도 적잖다.
간혹 무례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VIP에 대해서는 부정적 감정이 생겨 치료에 악영향을 주는 것도 VIP신드롬에 속한다.
VIP신드롬 극복 … “의료진은 팀 구상해 의견 나누고 환자는 의료진 신뢰하고 따라야”
VIP 신드롬은 누구의 잘못이라 따질 수 없는 현상이다. 좀 지나쳐서 그렇지 제대로 치료받고자하는 욕심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도와 다르게 나쁜 쪽으로 일이 꼬인다면 이를 막을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현명할 수 있다.
우선은 의료진의 각성과 준비가 요구된다. VIP가 대하기 어려워도 의학적인 객관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이때는 개인이 아닌 팀을 구상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간혹 일반 환자와 VIP는 다 똑같다고 해서 VIP 환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강직한’ 의사들도 보는데, 이것도 반드시 옳지는 않다.
의사들은 VIP 환자들의 요구 뒤에 있는 양질의 치료에 대한 희망과 심리적 불안을 제대로 읽고 공감할 수 있어야한다. 이렇게 하면 통상적으로 요구받는 특별대우가 아니더라도 환자들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환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부탁하고 들어가는 것까지는 우리 정서로 보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의료진이 권하는 절차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무시하거나 건너뛰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의료진을 신뢰하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치료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