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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흑사병’, 2억명 죽은 700년 전보다 진화했다?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9-11-18 07:35:15
  • 수정 2020-09-09 16: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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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쥐벼룩매개 패혈성 페스트서 비말감염 폐 페스트로 변형, 국내 유입 가능성 희박 … 겐타마이신 등 항생제로 치료
세계보건기구(WHO) 통계 결과 2010~2015년 오세아니아 지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3248명이 페스트에 감염돼 584명이 사망했다. 지도는 2016년 3월 기준 최근 연도 전세계 페스트 발병 지역.
먼 과거의 일로만 여겨졌던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plague, Pest) 공포가 21세기 동아시아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13일 중국 네이멍구(내몽고) 자치구에 거주하던 한 부부가 흑사병 의심 증상을 보여 베이징시 차오양구의 한 병원으로 옮겨진 뒤 폐 흑사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17일엔 네이멍구에서 사는 55세 남성이 림프절 흑사병을 진단받았다. 이 남성은 인근 채석장에서 야생토끼를 잡아 취식한 뒤 발열 증세를 반복적으로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접 국가인 중국에서 페스트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최근 5년(2014~2018년)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이 2914만명,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은 2120만명에 달하는 등 인적 교류가 활발해 흑사병 공포가 여진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질병관리본부는 신속위험평가를 실시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곽진 질병관리본부 신종감염병대응과장은 “현재 국내 유입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돼 감염병 위기경고는 4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인 ‘관심 단계’를 유지하기로 했다”며 “페스트 유입시 치료를 위한 항생제가 충분히 비축돼 있어 대응 역량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흔히 ‘페스트’로 불리는 흑사병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감염된 쥐벼룩을 매개체로 발병하는 급성 열성 감염병이다. 보통 페스트균을 가진 쥐벼룩에 물려 전파되지만 쥐 같은 설치류나 소형 포유동물 자체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폐 페스트의 경우 환자의 호흡기 분비물을 통한 비말감염 사례가 적잖아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크게 림프절 페스트, 패혈성 페스트, 폐 페스트로 구분된다. 전체 페스트의 75%를 차지하는 림프절 페스트는 2~6일의 잠복기를 거친 뒤 38도 이상 발열, 근육통, 관절통, 오한, 두통, 전신 무력감 등이 나타난다. 증상 발생 후 24시간 이내에 페스트균이 들어간 신체 부위에 통증이 생긴다. 벼룩이 주로 다리를 물기 때문에 흔히 허벅지나 서혜부 림프절에서 통증이 나타난다. 제 때 치료하지 않으면 20% 확률로 패혈성 페스트로 악화될 수 있다.
 
패혈성 페스트는 림프절 페스트와 같은 증상에 더해 상처 부위 출혈, 출혈성 반점, 혈관응고로 인한 피부괴사, 저혈압, 신장기능 저하, 쇼크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괴사된 피부조직이 까맣게 변해 흑사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700년 전 유럽에서 대유행했던 게 바로 이 유형이다.
 
이번에 중국에서 발생한 폐 페스트는 쥐나 벼룩이 매개체인 다른 유형과 달리 비말감염으로 전파돼 확산 속도가 더 빠르고 예후도 가장 나쁘다. 전강일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폐 페스트는 3~5일의 잠복기를 거친 뒤 먼저 발열 등 일반적인 페스트 증상이 발생한 뒤 빠른 호흡, 호흡곤란, 기침, 가래, 흉통 등 호흡기 증상에 객혈과 심부전 등이 동반돼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유형별 사망률은 림프절 페스트가 50~60%, 패혈증·폐 페스트가 30~100% 정도”라고 설명했다.

흔히 페스트는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다가 사라진 질병으로 여겨지지만 국내 발병 사례만 없을 뿐 전세계 곳곳에서 창궐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0~2015년 오세아니아 지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3248명이 페스트에 감염돼 584명이 사망했다.
 
페스트가 가장 악명을 떨쳤던 14세기 중반엔 유럽에서만 약 7500만명, 유라시아 전체에서 약 2억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럽은 인구의 3분의 1 혹은 절반이 페스트로 사망하면서 중세의 ‘장원제도(넓은 땅을 가진 영주가 자신의 땅에서 일하는 농노들을 지배하는 제도)’가 무너지는 등 사회·문화 전반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공동체생활을 했던 수도원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오면서 미신이 유행하고 대중의 신앙심은 곤두박질쳤다. 장원제도와 종교가 흔들리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본주의가 싹을 틔었고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으로 유명한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됐다.
 
페스트가 유럽으로 전파된 경위는 중동 원정을 떠났던 십자군이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퍼뜨렸다는 설과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확산됐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 중 후자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 페스트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347년이다. 몽골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킵차크칸국은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 크림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페오시야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지휘자였던 자니베크 칸은 도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투석기를 이용, 흑사병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도시 성벽 넘어로 쏘아보냈다. 시체를 이용한 ‘생물학 무기’로 인해 도시 전체엔 흑사병이 퍼졌고 결국 수비병들은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일부 시민들이 배를 타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제노바 등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흑사병이 유럽 전체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은 평균 기온이 하락하면서 농작물 생산력이 급감, 대기근으로 이어졌고 영양실조와 매서운 추위로 인해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못한 편이었다. 이로 인해 흑사병 피해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전체 유럽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고 특히 피해가 컸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지역은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등 쑥대밭이 됐다.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명확한 발병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거지, 유대인, 집시, 한센병 환자 등이 원흉으로 지목돼 마녀사냥식으로 살해됐다.
 
치료법도 엉터리였다. 당시 의사들은 불에 달군 쇠로 서혜부를 찌르거나, 검게 변한 부위의 정맥을 짼 뒤 피를 뽑았다. 심지어 오줌으로 목욕을 시키는 방법도 유행했다. 이같은 방법은 당연히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환자를 더 빨리 죽게 만들었다.
 
페스트는 항만이나 공항에서 실시하는 검역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항구도시인 베네치아는 페스트 전염을 막기 위해 배가 들어오면 선원들을 멀리 떨어진 섬에 40일간 격리시킨 뒤 감염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입항을 허가했다. 이 때 이탈리아어로 ‘40’을 의미하는 ‘quaranta’는 영어로 검역을 의미하는 단어인 ‘quarantin’의 어원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대유행했다. 몽골제국을 계승한 원나라가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유행해 당시 중국 인구의 30%가 사망했다.
 
이후 페스트는 사라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유행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 이후엔 주로 아프리카 동남부의 마다가스카르 섬과 아프리카 중앙의 콩고민주공화국 일대에서 창궐했다. 2012년엔 마다가스카르에서 총 256건의 발병 사례가 보고됐고 이 중 60명이 사망했다. 이 지역은 2017년에도 24명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2010년대 들어선 중국,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몽골 등에서 환자가 발생했다. 올해엔 몽골에서 설치류 생간을 먹은 사람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2014년 3명, 2016년과 2017년에 각 한 명이 이 질병으로 숨졌다.
 
현대의학에서 페스트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전염병으로 분류된다. 19세기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1822~1895)가 페스트의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발견하면서 생존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먼저 의심 증상이 나타나면 환자의 혈액·림프액·가래 등을 대상으로 페스트균 배양검사를 시행해 확진하고 항생제를 투여한다. 페스트 치료에 사용하는 항생제는 겐타마이신(gentamicin),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독시사이클린(doxycycline), 레보플록사신(levofloxacin)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예방 차원의 백신 접종을 권장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감염된 절대 인구 수가 많지 않고 확산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실험실 또는 병원 근무자처럼 페스트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고위험군에 한해 백신접종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전강일 교수는 “국내에서는 페스트 발병 사례가 없고 해외 발생 빈도도 흔한 것은 아니다”며 “단 한국인 여행객이 많은 북미나 중국 내륙 지역에서 발병 사례가 보고돼 여행 지역의 질병 정보를 미리 확인해보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이어 “항생제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지만 진단이 늦어질수록 사망률이 높아지므로 조기진단이 중요하다”며 “몇 시간 안에 증상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어 위험 지역을 여행한 뒤 기침, 고열, 두통, 구토 등이 나타나면 즉시 질병관리본부 콜센터(1339)에 신고하고 치료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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