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이면 찾아오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시즌에는 수능 특수를 노리는 각 업계의 수험생 겨냥 마케팅이 한창이다. 약국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성형수술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수능 이후부터 성형수술 부위에 바르는 안연고 판매가 급증한다. 수능 전에는 ‘수험생 관련 코너’에 잘 팔리는 제품을 따로 진열하기도 한다. 주로 피로회복제, 자양강장, 영양보충제가 배치되는데 의외로 경구피임약이 함께 있다. 시험 당일 컨디션 조절을 위해 생리일을 늦추려는 여학생들이 많이 구입한다.
피임약은 주로 임신을 피하기 위해 쓰는 약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전피임약은 생리주기 조절, 생리통 치료, 여드름 치료를 위해 복용하기도 한다. 가임기 여성에게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는 상황은 피임 목적이 아니라도 여행·수험·운동 등을 앞두고 언제든 생길 수 있다.
경구피임약은 크게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으로 알려진 응급피임약 두 종류로 나뉜다. 국내 사전피임약 시장 규모는 전문의약품·일반의약품을 포함, 약 300억원 수준이다. 일반의약품 분야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은 1992년 국내에 첫 출시된 알보젠코리아 ‘머시론정’(성분명 에티닐에스트라디올·데소게스트렐, Ethynylestradiol·Desogestrel)으로 지난해 매출액은 99억7500만원이다. 전문약 분야 점유율 1위는 바이엘코리아 ‘야즈정’(성분명 드로스피레논·에티닐에스트라디올, Drospirenone·ethynylestradiol)으로 작년 약 126억5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경구피임약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및 프로게스테론 유사체가 주성분인 합성의약품이다. 에스트로겐은 난포자극호르몬(Follicle-stimulation Hormone, FSH)의 분비를 줄여 난포 성장을 억제하고, 프로게스테론은 황체형성호르몬(Luteinizing Hormone, LH) 분비 증가(LH surge)를 눌러 배란을 억제한다. 경구 피임약의 피임 실패율은 0.5% 정도로 피임효과가 매우 뛰어난 편이다.
분명 피임약을 복용했는데도 임신을 했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약물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피임약 효과에 영향을 주는 약물에 대해 미리 알아두면 이런 원치 않는 임신이나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반대로 현재 복용중인 약물이 피임약의 영향을 받아 약효가 떨어질 수 있으므로 피임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약물 간 상호작용을 숙지하는 게 필수적이다.
또 피임약 복용 시 비타민B6, B12, 아연, 마그네슘, 셀레늄, 비타민C 등이 결핍이 올 수 있으니 부족한 영양소를 따로 보충하는 게 좋다.
항결핵약·항경련제 혈중 피임약 농도 낮춰
피임약은 간에서 분해되는 다른 약이나 음식과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이로 인해 피임약의 효과가 떨어지거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필수적이다. 부득이하게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을 병용해야 한다면 콘돔 등을 사용해 이중 피임을 하는 게 안전하다.
뇌전증(간질)의 항경련제인 페니토인(phenytoin), 카바마제핀(Carbamazepine), 바르비탈(barbiturates)계 약물, 프리미돈(primidone), 토피라메이트(topiramate) 등은 혈중 경구피임약 농도가 낮아져 피임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토피라메이트는 뇌전증 외 편두통을 적응증으로 갖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식욕억제 비만약으로 승인을 받아 국내서도 비급여 오프라벨로 종종 처방되므로 다이어터들은 유의해야 한다. 미국에선 조울증·알코올중독 등에 오프라벨 처방이 이뤄지고 있다.
결핵이나 잠복결핵 치료제인 리팜피신(Rifampin), 리파부틴(Rifabutin) 등을 복용해도 혈중 경구피임약 농도가 낮아진다. 이들 리파마이신 계열 살균성 항생제는 CYP(cytochrome) P450 3A, CYP 3A4 등의 간내 대사효소를 유도해 이들 효소에 의해 대사되는 약물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따라서 이들 약과 경구피임제를 병용하면 피임약 성분이 대사돼 피임효과가 감소될 수 있으므로 피임법을 비 호르몬성요법으로 바꾸거나 피임약을 증량하는 게 바람직하다. 간내 효소체는 호르몬을 대사시키므로 여성호르몬에 의한 피임 효과를 낮춘다. 때문에 경구피임약을 사용하는 리팜피신 복용자가 단기간에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HIV 치료제, 피임효과 낮추거나 혈전 위험 유발
에이즈 치료제는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의 증식을 억제하여 질병의 진행을 지연시킨다. 뉴클레오시드 역전사효소 억제제(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s, NRTIs), 비뉴클레오시드 역전사효소 억제제(non-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s, NNRTIs), 단백분해효소 억제제(프로테아제 억제제) 등이 있다.
이들 중 NNRTIs는 역전사효소 활성 부위 근처의 소수성 낭(hygrophobic pocket)에 직접 결합해 효소의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효소작용을 억제하는 약물이다. 에파비렌즈(efavirenz), 네비라핀(nevirapine) 등이 있다.
사후피임약 성분인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오리지널 현대약품 ‘노레보정’)과 에파비렌즈를 병용 시 레보노르게스트렐의 혈중 농도가 약 50%까지 감소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단백분해효소 억제제는 단백분해효소에 결합해서 작용을 억제하고 미성숙한 비감염성 바이러스 입자가 형성되게 함으로써 HIV를 치료한다. 아타자나비어(atazanavir), 리토나비어(ritonavir), 인디나비어(indinavir) 등의 약물이 해당되며 이들은 피임 효과를 감소시키거나 반대로 피임약 농도를 높여 혈전 등의 부작용 위험을 높이기도 한다.
우울증 보조치료제로 쓰이는 허브 성분의 세인트 존스워트(St John’s wart), 한약에 흔하게 들어가는 감초(Liquorice)도 피임약 효과를 낮출 수 있다. 이들 약을 장기적으로 복용하고 있는 경우 피임을 위해서는 경구피임약이 아닌 다른 피임법을 사용하는 게 좋다.
피임약 만나면 혈중 농도 높아지는 벤조디아제핀·베타차단제·삼환계항우울제
반대로 경구피임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약물도 있다. 피임약이 약물혈중농도에 영향을 미쳐 독성이 발현되거나 약물치료 효과가 약해지게 된다. 뇌전증 치료제인 라모트리진(lamotrigine)을 복용하는 경우 경구피임약이 라모트리진 혈중 농도를 낮춰 경련증상 조절에 실패할 수 있다.
코르티코스테로이드(corticosteroids),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s), 베타차단제(Beta-blockers), 삼환계항우울제(Tricyclic Antidepressants) 등은 피임약과 병용하면 상호작용으로 약물혈중농도가 높아지므로 이들 약물의 용량을 낮추는 게 권장된다.
35세 이상 흡연 여성이 피임약을 복용하면 안 된다. 피임약은 간 내 중성지방과 저밀도지단백(LDL) 결합 콜레스테롤을 함께 증가시킨다. 혈액 응고를 초래하는 효소인 ‘트롬빈’도 늘어난다. 이같은 요인들은 동맥경화와 혈전 생성를 초래하는 데다가 흡연 자체가 혈관 수축 및 경화를 부르므로 여성 흡연자가 경구피임제를 복용하면 뇌·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