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아이 같습니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나온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의 발언은 국가중앙병원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공공의료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야 할 국립중앙의료원(NMC)이 16년째 제자리 걸음인 서울 서초구 원지동 이전사업, 만성화된 적자, 의료기기 노후화 등 악재가 겹치며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엔 겉으로는 ‘공공의료 확대’를 외치면서 실질적인 예산 지원에 인색한 정부 당국의 무책임이 한몫했다. 의료계는 건강보험 혜택을 대폭 확대하는 ‘문재인케어’가 성공적으로 안착되려면 국립중앙의료원의 대대적인 체질 개선과 실질적인 재원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NMC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이슈는 원지동 이전 건이다. 신축 이전은 16년 전인 2003년 처음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원지동 화장장(서울추모공원) 건립 추진을 위한 주민 설득 방안으로 의료원 신축 이전을 제시했다. 이후 원지동 대신 세종시 이전 방안이 논의되다 다시 원래 계획으로 변경되는 등 혼란을 겪었고 2014년에야 서울시와 보건복지부가 의료원 신축 이전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2015년 이전 예정 부지에서 고인돌, 빗살무늬토기 등 문화재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가 나오면서 사업이 일시 중단됐다. 복지부와 서울시는 서로에게 매장문화재 보존 의무가 있다며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2016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 사태가 터지면서 사업 자체가 흐지부지됐다.
메르스 사태 이후 재차 원지동 이전이 추진됐지만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에 따라 신축 이전할 의료원 내 중앙감염병병원 설치가 결정되면서 서초구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 2월에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소음 탓에 부지를 의료기관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전략환경영향평가 보고서까지 나왔다. 병원 이전이 번번히 무산되자 결국 NMC는 지난 9월 8일 ‘원지동 이전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정 원장은 백지화 이유로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안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소음 환경기준 초과로 인해 지속적인 사업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NMC는 백지화 선언 한 달 만인 지난 10월 8일 “보건복지부가 원지동 이전사업 관련 대안을 마련하면 후속 제반 절차를 신속히 추진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이에 NMC 관계자는 “이전사업이 16년째 표류하면서 막대한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어 사업을 수행하는 당사자로서 어려운 상황임을 불가피하게 토로한 것”이라며 백지화 입장을 거둬 들였다.
이에 대해 한 의료계 관계자는 “NMC는 이전사업 당사자임에도 보건복지부나 서울시와 합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원지동 이전사업 추진 불가’라는 나홀로 행보를 보여 불필요한 혼선을 초래했다”며 “서울시와 복지부가 사업을 밀어붙이는 와중에 정작 당사자인 NMC는 이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전사업이 그동안 얼마나 체계적이지 않게 진행돼왔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병원 이전사업이 꼬이면서 경영 혁신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고 적자는 늘어갔다. 최근 5년간 NMC의 누적 적자는 212억원으로 5년 전 67억원보다 3배 이상 늘었다. 한 공공병원 관계자는 “공공의료기관은 민간의료기관이 기피하는 감염병 관리 특수보건의료, 취약계층 진료 등을 전담하기 때문에 적자 운영이 불가피하다”며 “다만 누적된 적자로 병원 시설·환경 개선, 우수 의료진 영입, 의료기기 확충 등이 이뤄지지 않아 의료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환자가 기피하는 병원으로 인식돼 재정 상황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산 부족에 따른 의료기기 노후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달 기동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NMC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병원 내 의료기기 1604대 중 501(31.2%)가 내구 연한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내구 연한을 초과한 의료기기 중 4년 이하 노후장비 비율은 58.5%, 5~9년 초과 장비는 34.1%, 10년 이상은 7.4%였다. 가장 오래된 의료기기는 수술용 현미경으로 1988년 처음 들여온 것이다. 수술용 현미경 내구 연한은 9년인데, 22년5개월이나 사용 기한을 초과한 셈이다.
의료기기나 병원 시설의 노후화는 사고로 직결된다. NMC에선 최근 6년간(2013~2018년) 의료기기 오작동, 시설 미비로 인해 237건의 안전사고 발생했고, 이 중 낙상 사고가 174건(73.4%)으로 가장 많았다. NMC는 낙상사고방지팀을 신설해 병원 시설과 장비를 점검하고 사고위험 환자에게 노란색 낙상 표시 손목밴드까지 착용케 하는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사고예방 효과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NMC 관계자는 “병원 이전사업이 어떻게 될지 몰라 리모델링이나 시설 증축에 투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며 “정부와 의료원 경영진이 병원 이전 관련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으면 임직원과 의료진의 ‘매너리즘’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NMC에서 뇌수술을 받은 노숙인들이 잇따라 숨지는 일도 있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김순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5~2018년 NMC 소속 신경외과 전문의인 A 씨에게 혈관문합술을 받은 뇌경색·뇌출혈 환자 38명 중 28명이 수술 후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혈관문합술은 머리를 연 뒤 두개 바깥쪽 혈관을 끌어다가 두개 안쪽 혈관에 직접 연결해 혈류를 개선하는 치료법이다. A 씨는 수술을 끝낸 뒤 환자의 뇌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하는 비윤리적 행위도 저질렀다.
김순례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환자 대부분은 노숙인으로 사망자 중 22명은 수술 전 이미 뇌사 상태이거나 뇌사에 가까웠다”며 “A 씨가 무의식 상태인 환자의 지장을 찍어 수술동의를 받은 사례도 있다”고 주장했다.
지나치게 짧은 수술 시간도 문제로 지적됐다. 보통 뇌수술은 한 건당 4~6시간이 소요되는데 사망 환자 중 5명은 수술 시간이 1시간, 12명은 1~2시간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의료계에선 의사가 뇌사 상태 노숙인 환자를 대상으로 수술 연습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현재 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해당 사건에 대한 합동 현장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NMC 관계자는 “현행법상 뇌사는 두 명의 의사가 12시간 간격을 두고 환자 상태를 종합적으로 체크한 뒤 판정하기 때문에 응급실에서 환자의 뇌사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뇌손상 환자가 실려왔을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응급수술이라 ‘뇌사자를 상대로 수술 연습을 했다’는 등의 의혹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환자의 뇌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은 의사로서 비윤리적 행위가 맞다”고 덧붙였다.
내우외환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국립중앙의료원장이 대통령보다 많은 고액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김광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민주평화당 의원실이 최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의 공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립중앙의료원장의 연봉은 2억5298만원으로 대통령의 2억3091만원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광수 의원은 “수억원의 연봉과 수천만원의 성과급을 기관장에게 지급하는 등 방만경영이 고질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며 “이들이 연봉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NMC가 국가중앙병원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정부의 예산 배정을 마냥 기다릴게 아니라 기관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적극적으로 나서 국회와 보건당국에 병원 혁신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추가적인 예산 지원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며 “서울시·복지부와 협업해 병원 이전사업을 차질 없이 준비하는 한편 우수 의료진 영입과 노화화된 시설 및 의료기기 개선을 통해 환자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