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음압병실, 올해는 천장을 뜯어내고 스프링클러에 공기청정기 설치까지. 1년 내내 공사만 하다 끝나네요.”
최근 몇 년새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C형간염 등 감염병 확산, 초미세먼지 유입에 따른 공기 질 저하, 화재 인명사고 등 악재가 겹치며 정부가 의료기관 시설 기준을 대폭 강화한 가운데 실제 진료현장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온다. 재정이 열악한 중소병원이 감당하기엔 일부 시설 기준이 너무 높게 설정된 데다 그마저도 수시로 바뀌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선 병원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부분은 공기 질이다. 최근 계절을 가리지 않고 미세먼지(지름 10μm 이하)와 초미세먼지(2.5μm 이하)가 한반도 하늘을 뒤덮고 있다. 미세먼지보다 4분의 1가량 작은 초미세먼지는 호흡기를 통해 폐포까지 침투해 천식·만성폐쇄성폐질환(COPD) 같은 호흡기질환과 심혈관질환을 일으킬 수 있으며, 최근엔 간암이나 대장암 등 악성종양과 우울증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정상인보다 면역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입원환자는 초미세먼지 등 유해물질에 노출될 경우 몸 상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 병원내 공기 질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돼야 한다. 이에 환경부는 의료기관 내 미세먼지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실내공기질관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지난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개정안에 따르면 연면적 2000㎡ 이상이거나 100병상 이상 의료기관은 △실내 공기질 관리기준 준수 △오염물질 방출 건축자재 사용 금지 △1년에 한 번 실내 공기질 자가측정 △1년 이내 신규교육 및 3년 이내 보수교육(교육시간 6시간) 등을 준수해야 한다.
실내 공기질의 경우 미세먼지 수치를 기존보다 강화된 75㎍/㎡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기존 수치는 100P㎍/㎡ 이하였다. 초미세먼지는 기존의 70㎍/㎡ 이하에서 35㎍/㎡ 이하, 독성물질인 포름알데히드(formaldehyde)는 100㎎/㎥에서 80㎎/㎥에서 기준이 강화됐다. 이밖에 이산화질소 0.01ppm 이하, 라돈 148Bq/㎥ 이하, 총휘발성유기화합물 400㎍/㎥ 이하 등 기준은 기존대로 유지되고 있다.
포름알데히드는 공기 중에 포함된 메탄이 햇빛·산소와 화학 반응해 생성되는 독성물질이다. 합성수지·화학제품·합판 제조, 쓰레기 소각, 석유 정제, 단열재, 실내가구 접착제 등에서 발생한다. 체중 1kg당 100mg을 섭취할 경우 50%가 사망하게 된다. 권고 기준을 초과하거나, 유해물질 측정 기록을 보존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기록하는 경우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동안 중소병원들 사이에서 미세먼지 억제 등 공기 질 관리는 우선순위 밖이었다. 지난 10월 발표된 한국실내환경학회의 ‘실내공기질 관리기준 검토 연구’에 따르면 전체 의료기관 중 33.3%에서 초미세먼지 수치가 기준치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실내공기질 관리법 대상 의료기관 수는 2013년 이후 17% 증가했다”며 “의료시설은 여러 용도의 공간이 한 건물에 집약된 데다 면역력이 낮고 감염 전파 위험이 있는 환자가 몰려 있어 다른 시설보다 높은 공기 질 수준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일선 병원에선 정부가 지원책도 없이 민간병원에 미세먼지 관리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중소병원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요구하는 수준의 공기 질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 측정장비 등을 설치하려면 한 층당 5000만원에서 1억원가량이 든다”며 “10층 규모 병원이라면 공기 질 관리에 최대 10억원가량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환자안전을 위해 의료기관 내 공기질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의료계와의 의견 조율을 거치지 않은 일방통행식 정책 추진은 저수가 체계에서 신음하고 있는 중소병원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 은평구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미세먼지 등 외부요인으로 공기 질이 저하되는 것인데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보여주기식’으로 병원의 시설 기준만 강화하고 있다”며 “4년 전 메르스 확산 땐 음압격리실, 밀양 세종요양병원 및 장성 효요양병원 화재 사건 땐 스프링클러 등의 시설 미비를 운운하며 모든 책임을 의료계에 전가하고 뒷짐만 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날을 세웠다.
또다른 중소병원 관계자는 “매번 큰 이슈가 터질 때마다 시설 기준이 강화되거나 바뀌어 급하게 병원 돈으로 천장과 벽을 뜯어낸 뒤 필요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며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연이은 공사에 따른 소음으로 환자 민원이 급증하는 등 이중, 삼중으로 손해를 보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2015년 메르스 사태 이후 병원내 감염 방지와 환자 안전을 이유로 시설 관련 법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 의료기관들은 강화된 기준에 따라병동 출입차단 방호문(스크린도어)과 바코드 인식기를 설치했고, 기침에 의한 침이 닿지 않도록 병상 거리를 1.5m 이상 떨어뜨리면서 기존 6인실을 4인실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병실 간 벽을 허물거나, 병상을 재배치하거나, 병상을 구분하는 가림막을 새로 갖춰야 했다.
2018년 1월엔 밀양 세종병원 화재로 46명이 사망하고 109명이 부상당하는 등 대형 인명피해가 나자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다. 현행법상 병원 바닥면적 합계가 600㎡ 이상이면 스프링클러를, 600㎡ 미만이면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 이에 병원들은 천장을 뜯고 스프링클러와 제연설비 등을 갖추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 지난 7월부터 공기 질 기준까지 강화되자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천장을 뜯어낸 뒤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 측정기를 달고 있다.
대한중소병원협회 관계자는 “빚내서 시설 공사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차라리 벌금을 내고 말겠다는 병원들이 적잖다”며 “정부가 미세먼지나 감염병 확산 등 사회적인 문제를 의료기관의 시설 기준 강화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손 안 대고 코풀기’나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선 병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요구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일부나마 재정적인 부분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재정당국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