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혜택을 확대해 환자의 진료비 부담을 대폭 줄인 ‘문재인케어’의 여파로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이 심화됐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정부가 의료전달체계 개선을 목표로 추진 중인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역 중소병원과 의원급 의료기관들은 이 사업이 오히려 환자쏠림을 가속화해 상급종합병원에만 ‘득’이 됐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상급종합병원들은 일부 지역 병·의원들의 진료의뢰 남발로 본연의 역할인 연구와 중증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겼다는 입장이다.
2016년 5월부터 시행된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은 경증·만성질환 환자관리는 지역 병·의원이, 중증·급성기질환 치료는 대형병원이 전담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역 병·의원 등 1단계 의료기관이 협약을 체결한 전문병원·종합병원(300병상 이상)·상급종합병원 등 2단계 의료기관에 중증 환자의 진료를 의뢰하고, 이후 중증질환의 진료 및 치료가 끝나거나 경증으로 판정된 환자는 다시 지역 병·의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동네의원과 중소병원이 2단계 의료기관에 환자를 보내면 1만원, 2단계 의료기관이 다시 지역 병·의원으로 환자를 회송하면 4만원의 수가를 지급받게 된다. 올해 2월 기준 상급종합병원 42곳과 종합병원 61곳, 협력 병·의원 1만6713곳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진료 현장에서 큰 병원으로의 진료의뢰는 활발히 이뤄지는 반면 지역 의료기관으로의 환자 회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왜곡된 의료전달체계 개선이라는 원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J 대학병원 관계자는 “급성기 치료가 끝나고 환자를 지역 의료기관으로 돌려보내고 싶어도 환자가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며 “문재인케어의 영향으로 대학병원과 동네 병·의원의 진료비 격차가 줄어든 상황에서 환자도 이왕이면 규모가 큰 병원에서, 교수급 의료진의 관리를 받고 싶어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대학병원 관계자는 “병원 업무만으로 과부하가 걸린 상황에서 환자 회송에 필요한 서류 작성 등 행정적 절차가 더해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병원 관계자들이 많다”며 “고작 4만원의 수가만으로 환자 회송에 동기를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급종합병원도 진료의뢰 환자가 급증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K 대학병원 관계자는 “이미 외래와 입원 모두 수용한계를 초과한 상황에서 진료의뢰 환자까지 겹쳐 극심한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며 “무분별한 환자 의뢰는 빠른 조치가 필요한 중증 환자의 치료기회를 박탈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에선 상급종합병원이 1차 의료기관에게 공문을 보내 진료의뢰 자제를 요청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정형외과 개원의는 “상급종합병원들은 이미 환자가 넘치고 있어 환자 의뢰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며 “환자에 이어 이제는 큰 병원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환자의 요구로 경증질환임에도 상급종합병원으로 진료를 의뢰하는 폐단도 불거졌다. 최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된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 추진현황 분석결과’에 따르면 전체 진료의뢰 건 중 환자 요청 등 비임상적 사유로 인한 진료의뢰가 24%를 차지했다.
진료의뢰를 받는 의료기관 중 상급종합병원과 전문병원 사이에 낀 종합병원 ‘패싱’도 논란거리다. 서울 은평구의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진료의뢰 대상인 환자는 대부분 규모가 큰 상급종합병원이나 전문성이 입증된 전문병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포지션이 어중간한 일반 종합병원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상황”이라며 “평소 같으면 종합병원을 이용할 환자들이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의 영향으로 전문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오히려 의료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종합병원 중 상당수가 중증질환을 치료·관리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도 문제다. 병원계 관계자는 “일부 종합병원들이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볼멘 소리를 하지만 정작 중증질환 환자 의뢰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많다”며 “상급종합병원이나 전문병원에 비해 의료진이나 첨단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고난도수술을 감행하다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단순히 사업 대상 의료기관을 1·2단계로 단순화할 게 아니라 진료 분야별로 세분화하고, 수가 인상이나 추가 인센티브 지급 등 적절한 보상책이 마련돼야 진료 의뢰·회송 시범사업이 제대로 운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