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노인·장애인·정신질환자·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사회 중심 돌봄 선도사업’, 이른바 ‘커뮤니티케어’ 시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한국형 주치의제도’ 도입론이 재차 탄력을 받고 있다.
커뮤니티케어는 돌봄이 필요한 지역주민이 지역사회에 거주하면서 개인에 맞춘 의료·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서비스 체계다. 그동안의 병원과 시설 중심 서비스가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지역사회 단위 케어서비스의 필요성이 강조돼왔다.
이들 지자체는 시범사업 기간 동안 사업 전담조직을 두고 지역내 의료기관, 정신건강기관, 복지기관 등과 연계해 노인·장애인·정신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주거·의료·돌봄 관련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의료 분야에선 만성질환관리제도(만관제)와 연계해 방문의사·약사제도, 치매진료·검사 지원, 노인우울증 관리 등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커뮤니티케어 선도사업엔 총 63억90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노인장기요양서비스, 돌봄서비스, 가사간병서비스, 재가복지서비스 등 다양한 돌봄서비스가 있지만 모두 분절돼 체계적이지 못하고 의료진과 대상자 모두 혼란스러워했던 게 사실”이라며 “제대로 된 커뮤니티케어를 도입하기 위해 먼저 지자체, 1차의원, 요양원, 가정 간 연계체계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만성질환관리제, 커뮤니티케어 시범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의료계에선 주치의제도 도입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가정의학과와 내과 의사들은 커뮤니티케어 사업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주치의제도와의 연계가 필수라고 주장하는 반면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한 의사단체들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입장이다.
주치의제도는 환자가 동네의원 의사 한 명을 주치의로 등록하고 일정 금액을 내면 경증질환 진료를 비롯해 전반적인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시행 중인 만성질환관리제가 고혈압과 당뇨병에 국한되는 것과 달리 내분비계질환, 소화기계질환, 피부과질환, 근골격계질환 등 여러 진료과의 경증질환을 종합적으로 관리한다.
주치의제가 가장 잘 확립된 영국에선 NHS(국가보건서비스)라는 명칭으로 운영되고 있다. NHS는 환자가 의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중 원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는 국내 의료시스템과 달리 주치의가 ‘메디컬 게이트키퍼’로서 환자를 가장 먼저 진료한 뒤 병의 경중에 따라 직접 치료할지, 대형 종합병원으로 이송할지 결정한다.
영국의 의료전달체계는 주치의(GP)가 담당하는 ‘1차의료’와 전문의와 종합병원이 담당하는 ‘2차의료’로 구분된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거주 지역내 1차 진료의사를 주치의로 등록해야 한다. 주치의는 약사, 지역간호사와 의견을 교류한다. 주치의는 독립된 개인사업자이지만 GP조직을 꾸려 NHS와 계약을 맺기 때문에 사실상 NHS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차의료는 NHS소속 병원으로 국내의 종합병원에 해당한다.
국내에선 1996년 ‘주치의등록제’ 시범사업이 추진됐지만 의료계 내부의 반발과 정부의 의지 부족으로 잠정 연기됐다. 그러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재차 필요성이 언급됐고, 최근 만성질환관리제 및 커뮤니티케어 시행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선 초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부담으로 우리보다 먼저 주치의제도 도입을 고려했다.
주치의제도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가정의학과 의사들이다. 대한가정의학회는 지난달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소비자연맹, 녹색소비자연대 등 시민단체 등과 함께 ‘주치의심포지엄’을 열고 주치의제도 선포식을 가졌다.
이덕철 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연간 외래진료 건수 17회(회원국 평균 6.9회)로 가장 많은 국내 현실에서 주치의제도는 환자의 무분별한 의료쇼핑과 의료기관 간 과다경쟁을 줄일 수 있다”며 “주치의 입장에선 단순히 진찰 횟수가 많다고 해서 의료수가가 오르는 게 아니라 과잉진료나 투약을 막는 데 도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1차 의료기관과 대형병원의 역할을 분리해 경쟁을 최소화하면 왜곡된 의료전달체계가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라며 “의료쇼핑을 막으면서 소외된 계층에겐 적정 의료를 제공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의료소외계층을 줄이는 효과도 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최용준 한림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는 “주치의제도는 의사가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와 생활습관, 가족력 등을 잘 파악하고 있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며 “환자가 현재 앓고 있는 질병 외에 다른 질병의 경고신호를 발견하거나, 응급상황 발생시 더 신속 정확한 치료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환자는 내 의사라는 생각, 의사는 내 환자라는 상호책임감을 형성할 수 있다”며 “환자를 잘 안다는 점은 응급상황이나 평소 진료를 할 때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OECD 국가 중 연간 외래진료 건수가 12.8회로 한국에 두 번째로 많은 일본도 주치의제도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현지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 후생노동성은 과잉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1년까지 공적의료보험 관련법을 개정, 지정된 주치의가 아닌 의료기관에서 진찰 및 치료를 받으면 의료비 부담을 증가시키는 방식의 주치의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일본의사회가 주치의등록제에 반대해 실제 도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에서도 1980년대 ‘가족의’라는 이름으로 주치의제도 도입이 검토됐지만 의사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국내에선 내과 및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제외한 의사들 대부분이 주치의제도에 반대하고 있다. 진료과 간 형평성이 떨어지고, 신규 개원의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펴고 있다.
노만희 대한개원협의회 회장은 “주치의제도가 시행되면 진료 범위가 넓은 내과나 가정의학과 개원의는 유리하겠지만 진료 범위가 한정된 다른 진료과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라며 “전체 의사 중 전문의가 80%를 차지하는 등 전문의 영역히 확실히 구분된 국내 의료체계에서 한 의사가 여런 질병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주치의제도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개원 진입장벽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의협 관계자는 “주치의제도로 의료기관과 지역사회 간 연결고리가 단단해지면 해당 지역에서 새로운 병·의원을 개원하기가 힘들어져 의료인간 계층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며 “신규 의사들의 생존과 권리를 어떻게 보장해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병원이든, 전문병원이든, 의원이든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현재 의료체계에 익숙한 국민들은 주치의제도가 시행될 경우 의료선택권을 제한받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며 “주치의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내과 및 가정의학과 전문의들은 제도의 장점만 홍보할 게 아니라 단점과 문제점도 국민에게 솔직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