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66년 만에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리자 여성들과 시민단체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보건당국의 ‘낙태수술(인공임신중절수술) 집도의 처벌죄’에 반대하며 ‘수술 전면중단’을 선언했던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면서도 헌재 판결에 따른 법 개정까지 공백 기간에 일선 진료현장의 혼란을 막으려면 낙태수술이 허용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1일 헌재는 2017년 12월 산부인과 의사 A씨가 낙태죄 처벌조항 자기낙태죄(형법269조 1항) 등에 대해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법불합치 4대, 단순위헌 3대, 합헌 2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임신 22주 전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2012년 8월 낙태죄에 대해 ‘태아의 생명권’을 들어 4대 4 합헌 결정을 했었다.
헌법불합치는 법 조항은 위헌이지만 바로 무효가 되면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어 법 개정 시한을 정해 일시적으로 해당 조항을 존속시키는 경우에 내려진다. 이번 판결로 낙태죄는 2020년 12월 31일 전 국회가 법 조항을 개정할 때까지 잠정적으로만 효력을 유지한다.
형법이 규정한 낙태죄는 1953년에 입법됐다. 형법 269조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형법 270조는 의료인이 낙태수술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 따라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거나 △전염성 질환을 앓고 있거나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한 등의 상황에선 임신 24주까지 예외적으로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다.
낙태죄 위헌 판결로 낙태수술 집도의사를 처벌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도 사문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8월 중순 형법 제270조를 어겨 낙태시술 등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의료진을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하도록 하는 규칙을 공포했다.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등은 곧바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강력하게 반발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인공임신중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임신부마저 수술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등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복지부는 지난해 8월말 한발 물러나 낙태죄에 대한 헌재의 위헌 여부 결정이 나올 때까지 의사 처벌을 유예하기로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죄 위헌 판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재연 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그동안 낙태죄는 여성과 산모들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했고, 기형아의 현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며 “낙태수술의 주된 이유로 꼽혔던 사회·경제적인 사유의 인정 범위, 임신 주수별로 임신 기간에 따른 낙태 허용 범위, 건강보험 적용 여부 등을 정부와 전문가단체들이 모여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면서도 태아의 생명권을 최소한으로 침해하는 낙태 허용 기간도 논란이 되고 있다. 헌재는 이번 판결에서 낙태시술이 가능한 시기를 22주로 제시했다. 22주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기다.
임신 24주를 기점으로 낙태 허용 여부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H대 산부인과 교수는 “의학적으로 임신 24주 이내의 태아는 허파를 구성하는 폐포가 될 종말낭이 형성되지 않아 자궁 밖에선 독자적으로 호흡할 수 없다”며 “현행 모자보건법이 부모가 신체질환 또는 정신장애를 앓거나, 강간 등에 의해 임신한 경우 임신 24주 이내에 한해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임신 12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임신 12주 이후의 태아는 사고, 자아인식 같은 의식적 경험에 필요한 신경생리학적 구조나 기능이 갖춰져 하나의 생명체로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임신 12주 이전에 낙태시술을 하면 자궁천공, 출혈, 패혈증, 양수전색증(양수가 산모의 혈관속으로 역류해 들어가 혈액응고인자를 소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혈액응고장애를 초래할 수 있음) 등 산모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위험이 적은 것도 근거로 제시된다.
산모 안전을 위해 8주로 제한하자는 의견도 있다. 낙태로 인한 신체적인 후유증의 발생 위험은 10% 정도로 추산된다. 사망 등 중증 합병증 발생률은 2% 수준이다. 미국 연구에 따르면 임신 8주부터 2주가 지날 때마다 낙태로 인한 산모의 사망률이 2배씩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6개 국가 중 31개국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프랑스·독일·덴마크·오스트리아·노르웨이·중국 등에서는 임신 12주, 영국과 대만은 24주, 일본은 22주까지 임부가 요청하면 합법적으로 낙태시술을 받을 수 있다.
독일에선 상담의사와 시술의사를 구분해 무분별한 낙태수술을 막고 있다. 낙태를 원하는 임신부는 시술 3일 이전까지 상담의사을 찾아 상담사실증명서를 받아야 낙태시술을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같은 방식이다. 영국은 임신 24주 이내이면서 의사 두 명의 소견서가 있다면 낙태시술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은 공화당인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주별로 낙태를 제한하는 법안이 대거 채택되고 있다.
의사들은 낙태가 허용되는 기형아 기준을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행법에 따르면 임산부·배우자가 유전학적 정신장애가 있거나 임신 중기에는 산모가 풍진 같은 전염성 질환에 걸리면 기형아 유발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낙태가 허용됐다. 반면 무뇌아 등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선천성 기형의 경우 낙태가 허용되지 않아 임산부와 가족에게 가혹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산부인과의사회는 “낙태죄 헌법소원 결과에 따라 정부·국회가 법률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키고,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발생할 수 있는 진료실에서의 갈등 최소화를 위해 정확한 지침을 제시해 우선의 혼란을 막아달라”고 강조했다.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낙태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진료거부권’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스스로 산부인과 의사라고 밝힌 글쓴이는 “신비롭게 형성된 태아의 생명을 제 손으로 지울 수 없다“며 ”낙태가 합법화돼 산부인과 의사가 당연해 해야 하는 시술이 된다면 산부인과 의사의 길을 접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청원은 19일 기준 3만5000여명이 지지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