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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사회
혈액 부족한데 수혈은 펑펑? … 정책방향·급여제도 개선해야
  • 손세준 기자
  • 등록 2019-04-11 18:35:21
  • 수정 2020-09-25 02: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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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감소로 수급불안 불가피 … 수혈의존도 낮추고 고함량 철분주사제 급여화 필요

고령인구 증가 등으로 혈액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수혈 최소화와 수혈대체의약품 급여 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매년 2월이 되면 국내 혈액수급 기관에는 비상이 걸린다. 헌혈 가능한 연령은 만 16세 이후로 전체 헌혈자의 약 30%가 만 19세 이하의 고교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방학에 들어가는 동·하절기엔 헌혈자 수가 수만 건 감소하게 된다. 20대까지 합하면 전체 헌혈자 중 70%를 차지한다. 게다가 신종플루, 독감 등이 만연하면 수급 사정은 더욱 열악해지기 마련이다. 

이같은 어려움과 모순되게 혈액 폐기는 늘고 있다. 혈액검사에서 부적합한 결과를 보이거나 C형간염 등 기타 질병이 의심되는 혈액은 폐기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에만 8만 개가 넘는 혈액이 사라졌다. 혈액수급이 불안정하면 일선 병원에서 수술 시 문제가 될 수 있다. 혈액형별 수급도 제각각이어서 병원으로는 응급상황에서 난감한 경우에 처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정부와 관련 기관은 전력수급 경보를 발령하는 것처럼 헌혈 독려에만 집중할뿐 수혈량을 줄이거나 폐기량을 절감하는 합리적 대안은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혈액수급 부족의 심각성은 근본적으로 인구사회적 변화에서 비롯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면서 헌혈은 감소하고 수혈은 증가하고 있어서다. 헌혈을 많이 하는 젊은 인구는 감소하고 질병 등으로 수혈이 필요한 50대 이상 인구는 증가하는 추세다. 이에 혈액보유량은 최소한의 적정 기준인 5일분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기준선을 밑도는 날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중국 등에선 불안정한 혈액수급 문제를 일찌감찌 겪으며 근본적인 정책방향을 바꾸고 있다. 이들 국가에선 수혈을 감소시키는 정책기조를 채택하고 수술법 등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혈액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수혈에 따른 부작용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환 중이다.

수혈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은 다양하다. 수술 등으로 수혈 받는 환자는 기본 면역력이 떨어진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부작용 발생 가능성도 높다. 타인의 혈액을 받아들이는 것은 장기이식과도 비슷해 수혈받는 사람에게서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그 부작용으로 저혈압, 발열, 호흡곤란, 어지럼증 등이 나타날 수 있고 심하면 급성 폐손상과 같은 합병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면역거부반응 등으로 암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에 국내 수혈 부작용 신고 건수도 매년 늘어 2016년 한해에만 3293건(질병관리본부 통계)에 이른다.

박종훈 고려대 의대 안암병원장(정형외과·무수혈센터장)은 “혈액은 200여가지의 단백질과 수많은 세포가 존재하는 하나의 장기에 가깝다”며 “타인의 혈액이 DNA 체계를 교란하고 암 발생을 높이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어 수혈 부작용에 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과학기술학술지 ‘네이처(Nature)’에 ‘피를 아껴야 생명을 구한다(Save blood, saves lives)’는 제목의 논문이 실려 화제가 됐다. 이 논문은 수혈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며 오남용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수혈을 최소화한 결과 환자 사망률은 5.5%에서 3.3%로, 입원기간은 10.1일에서 6.2일로 감소했다. 수혈 최소화 관련 연구가 계속되면서 의학계에선 고전적인 수혈 의존방식에서 벗어나려는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2010년 수혈 최소화를 위한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무수혈 수술’을 도입한 병원이 점점 늘고 있다. 무수혈센터 등을 설립해 무수혈 수술사례를 늘리는 노력을 기울고 있으나 개별 병원의 선제적 도입일 뿐 전체적으로는 도입 비율이 아직 미미하다. 이 수술법은 환자혈액관리(PBM, Patient Blood Management)를 원칙으로 삼아 우선 환자 본인 피를 최대한 활용하고 수술 중 출혈을 줄이되 필요한 경우에만 수혈받도록 한다.

위암 수술을 예로 들면 국립암센터의 수혈 비율은 1%가 안 된다.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등에서도 무수혈 수술을 기본 원칙으로 택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전체 위암 수술의 수혈 비율은 20% 수준으로 병원·의사별 차이가 커 갈길이 멀다.

김영우 환자혈액관리학회 회장(국립암센터 일반외과 교수)은 이같은 격차를 줄이기 위해 PBM을 표준치료 방식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보다 노인인구가 많은 일본과 비교해 우리가 2배 정도 혈액을 많이 쓴다”며 “응급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수혈을 당연시하는 경향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학화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적혈구제제 사용량은 한국은 인구 1000명당 41유닛인 데 비해 일본은 26.3유닛이다. 한국이 일본보다 50%남짓 혈액을 남용하는 셈이다. 수혈 가이드라인은 환자의 혈액 내 헤모글로빈 수치가 7g/㎗ 이하일 때 수혈받기를 권고하고 있으나 현장에선 9~10g/㎗임에도 수혈이 이뤄지는 게 관행화됐다.
 
혈액을 많이 쓰는 원인으로 관행보다는 건강보험을 꼽는 의견도 많다. 적혈구제제에 대해선 건강보험 적용에 제한이 없어다. 혈액을 펑펑 써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별도평가를 하지 않아 급여청구액을 삭감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혈액을 많이 쓸수록 환자의 중증도가 올라가는 것으로 기준이 정해져 혈액 오남용이 조장되는 모양새다. 쓰면 쓸수록 이윤이 남는데 재정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병원 입장에선 수혈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정재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과도한 수혈이 안 좋을 수 있고, 수혈대체치료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부족한 것도 수혈 남용의 이유”라며 “피를 모으는 데 집중하는 혈액질 검사·관리 위주의 헌혈 정책에서 벗어나 최소수혈을 통해 수요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혈을 대체하는 치료제로는 고용량 정맥 철분주사제가 주로 활용된다. 수술 전 몸 안에 철분량을 늘려주면 빈혈 등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조혈제 등을 맞으면 피의 양이 많아져 수술 시에 출혈 부담이 줄어든다. 기존 철분제는 여러 번에 걸쳐 복용해야 하고 효과가 떨어졌으나 주사제 형태로 처방되고 있는 최신 고용량 제품은 단시간에 적정 수준으로 수치를 올려준다.

JW중외제약의 ‘페린젝트(성분명 페릭 카르복시 말토즈, Ferric carboxymaltose)’와 한국팜비오의 ‘모노퍼(성분명 철이소말토시드착염, iron isomaltoside complex)’ 등이 대표적이다. 페린젝트는 15분간의 투여로 하루 최대 1000㎎의 철분을 보충할 수 있어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제조사가 제시한 임상결과를 보면 대장절제술을 받기 전 고용량 철분주사제를 투여받은 환자 중 9.9%가 수혈받는 데 그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38.7%에 달해 수혈대체 효과가 큰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심평원은 지난해 2월 진료상 필수적이지도 않고 임상적 유용성도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비급여 판정을 내렸다. 당시 약제급여평가위원회는 페린젝트가 같은 회사의 비교약제인 ‘베노훼럼주(성분명 수크로오스수산화제이철착염 iron hydroxide sucrose complex)’에 비해 투약 횟수가 감소해 편의성이 개선돼 임상적 유용성 개선은 인정되지만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점, 혈액투석환자에 대한 임상적 유용성 불분명함을 이유로 비급여 등재시켰다.

인구감소로 혈액수급이 어려워지면 다른 나라에 비해 저렴하다고 평가받는 한국 혈액 값도 오르게 돼있다. 과도한 수혈을 조장하는 심평원의 적혈구제제 기준으로 낭비되는 혈액과 건강보험 재정을 고려하면 혈액수급 문제도 해결하고 수혈 부작용도 줄일 수 있는 관련 약제 급여화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일선 병원에선 비급여임에도 불구하고 약 35만~40만원의 비용을 감당하며 고함량 철분주사제를 찾는 환자들이 많다. 인터넷 카페 등에선 이 주사제의 효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비용이 저렴한 병원을 문의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용량 철분주사제는 수술 전후에 처방되는 것 외에도 임산부의 빈혈이나 산모와 태아 건강에 효과적이다. 여성의 임신 연령이 높아지고 다이어트가 일상화돼 빈혈을 겪는 산모가 증가하고 있어서다. 경구용 철분제 섭취가 어려운 임산부나 단기간 고용량의 철분 보충이 필요한 환자에겐 정맥주사용 철분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의료현장의 요구와 세계적 추세에 부응해 인구사회적 구조변화에 맞는 정부의 세심한 정책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무수혈 수술이 모든 치료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불필요한 혈액 낭비를 막고 필요한 사람에게 양질의 혈액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견해다.

혈액이 부족하다고 매년 경보를 울려대면서도 소중한 혈액을 물쓰듯 펑펑 쓰는 행태는 고함량 철분주사제에 비급여 등재로 대처하는 정부 기준에 비춰 모순된다. 젊은이들 혈액을 펑펑 쓰다가 10~20대가 방학하는 시기엔 혈액수급에 전전긍긍하는 풍경도 이젠 사라져야 한다. 대한적십자사 경영공시에 따르면 혈액사업 수입은 2014년 3985억원에서 2017년 4302억원으로 오히려 늘었다. 무료로 조달한 혈액으로 돈을 벌고 합리적 대안에 무관심한 모습은 개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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