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간 국내 대표 여성 전문병원의 위상을 유지해 온 제일병원이 재단 측의 방만경영과 저출산에 따른 경영난으로 폐원 위기를 맞은 가운데 마지막 병원장과 기획실장 등 핵심 의료진마저 잇따라 병원을 떠나고 있다.
제일병원 의료진, 간호사, 의료기사, 일반 행정직원 등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급여를 20~40% 삭감당했고, 같은 해 10월부터는 아예 임금을 받지 못했다. 올해 들어서는 정상적인 외래진료와 검사마저 불가능해져 끝까지 남아있던 주요 보직자마저 병원을 떠났다. 현재 전체 의료진의 80% 이상이 이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일병원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전문의만 30명에 달했던 산부인과엔 현재 의료진 한 명만 남아있으며 내과도 한 명, 소아과는 2~3명, 마취과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마지막 제일병원 병원장을 지낸 남성 난임 권위자 서주태 전 병원장(비뇨의학과 전문의)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던 이효석 비뇨의학과 전문의와 함께 지난 21일 서울 논현동에 서주태비뇨의학과를 개원했다. 서 전 병원장은 “기본적인 검사마저 어려워지면서 수년째 맡아왔던 환자들의 불편이 극심해져 급히 진료할 수 있는 공간을 꾸리게 됐다”고 말했다.
기획실장을 지낸 김문영 산부인과 교수는 지난 1일부터 차의과학대 강남차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산전초음파 진단과 태아치료 분야 권위자로 약 1만7000건의 분만진료에 참여했으며, 이영애 씨가 2011년 제일병원에서 쌍둥이 자녀를 출산할 당시 주치의로 활동했다. 현재 대한산부인과초음파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쌍둥이 이상 다태임신과 태아진단 권위자인 정진훈 산부인과 교수도 지난 1월 15일자로 강남차병원 산부인과로 자리를 옮겼다. 정 교수는 2016년 국내에서 세쌍둥이 자연분만에 성공했으며, 총 2500건의 쌍둥이 분만을 집도했다.
유전진단 및 고위험산모 분야를 담당하는 한유정 산부인과 교수도 지난 1월 강남차병원 산부인과로 이직했다. 태아 기형 유전자진단의 권위자인 류현미 교수도 이달 초부터 분당차병원으로 옮겨 진료하고 있다. 김혜옥 산부인과 교수는 지난해 12월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서울역센터로 이직했다. 1만건이 넘는 시험관아기시술을 시행한 난임치료 권위자다.
부인암 분야 권위자인 김태진 산부인과 교수와 소경아 교수는 지난 1월 1일자로 건국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태진 교수는 건국대병원에서 여성부인종양센터장 보직을 새로 맡았다. 전세계 여성암 발생률 2위이자 자궁경부암 직전 단계인 자궁경부전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 개발에 공헌한 부인암 명의로 꼽힌다. 소경아 교수는 부인암수술, 항암치료, 복강경수술 전문가다.
최준식·이인호 교수도 각각 동탄제일병원에 영입돼 진료 중이다. 동탄제일병원 부원장을 맡은 최준식 교수는 조산, 임신 중 약물관리, 고위험 임신 전문가다. 이인호 교수는 부인안 검진 및 상담, 양성 여성질환, 부인과 복강경수술을 맡고 있다.
1963년 서울 중구 묵정동에 개원한 제일병원은 2000년까지 전국 분만 실적 1위 자리를 기록했지만 이사진의 방만 경영과 저출산 여파로 경영난이 지속돼 폐원 위기를 맞게 됐다. 제일병원 분만 건수는 2014년 5490건, 2015년 5294건, 2016년 4496건, 2017년 4202건으로 매년 감소세를 기록했다.
제일병원의 대출금을 포함한 채무 규모는 1336억5000만원에 달한다. 제일의료재단은 병원 부지를 매각해 쌓인 채무를 갚고, 남은 금액으로 대체부지에 병원 건물을 옮길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차병원과 산부인과 양대 축을 형성했던 제일병원이 폐원 위기에 몰리고 의료진이 대거 이동하면서 차병원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쏠리게 됐다”며 “‘럭셔리’를 표방했던 차병원과 달리 서민적·대중적인 산부인과를 추구했던 제일병원의 몰락은 극심하게 어려운 산부인과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