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영리병원인 제주도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5일 제주도가 외국인 환자만 진료할 수 있도록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조건부 허가한다고 밝히자 병원 측은 이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원희룡 경기도지사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감소세로 돌아선 제주도 관광산업의 재도약, 건전한 외국인투자자본 보호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공공의료체계 근간 유지 등을 고려했다”며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조건부로 허가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개원 허가로 녹지국제병원은 내년 3월 4일까지 필수인력을 채용하고 운영에 들어가야 한다. 조건부 허가로 외국인 환자만 진료할 수 있으며, 국내 환자 진료는 제한된다. 하지만 병원 측이 조건부 허가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공문을 제주도 측에 보내면서 기한 내 개원이 어려운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허가 발표 다음날인 6일 녹지국제병원 운영을 맡고 있는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은 “개설 허가 조건으로 진료대상자를 ‘제주도를 방문하는 외국인 의료관광객’으로 한정한 것은 위법하다”며 “조건부 허가에 대한 법적 대응 가능성을 적극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제주도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며 강경 대응할 방침이다. 제주도는 이날 “내국인 진료 제한은 의료공공성 확보를 위해 지켜내야 할 마지노선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칙을 지키겠다”며 “전담 법률팀을 꾸려 소송에 총력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또 소송을 제기한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 측이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사업계획을 승인받을 당시 사업계획서에 스스로 ‘외국인 의료관광객 대상 의료서비스 제공’이라는 사업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을 설명하며 사업계획서 일부 내용도 공개했다.
아울러 이 병원이 내국인 대상 진료를 하지 않더라도 의료법 위반(진료거부)이 아니라는 보건복지부 유권해석을 지난해 1월 이미 받은 것으로 미뤄 사실상 외국인 진료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녹지국제병원과 제주도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양측의 법적 공방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과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도 내 외국인 또는 외국인이 의료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법인 등이 영리병원을 설립하려면 보건복지부장관의 승인과 도지사의 개설 허가를 받아야 한다.
중국 부동산개발회사 녹지그룹(뤼디그룹)의 자회사인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는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로부터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이후 총 778억원을 투자해 2017년 7월 서귀포 헬스케어타운 내 2만8163㎡ 부지에 지상 3층·지하 1층, 47개 병상 규모로 병원을 준공하고 그 다음달 제주도에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를 신청했다.
이에 도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꾸려 녹지국제병원의 개설 여부를 심사했다. 당시 심의위는 “외국인 의료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한 의료서비스 제공을 조건으로 허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국내 첫 영리병원의 개설 허가 심사가 시작되자 제주지역을 비롯해 전국 의료·시민사회단체들은 건강보험 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의료공공성을 훼손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반대 여론이 거세자 제주도는 공론화를 거치기로 하고 지난 4월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지난 10월 4일 공론조사위는 “개설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선택한 비율이 58.9%(106명)로 개설을 허가해야 한다고 답한 38.9%(70명)을 20%p 앞서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불허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이에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공론조사 결과를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왔지만 지난 5일 돌연 내국인 진료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한 ‘조건부 개설 허가’ 결정을 발표해 시민단체와 지역 의료계를 당혹스럽게 했다. 원 지사는 “녹지국제병원은 내국인 진료를 금지하는 데다 진료과목을 성형외과·피부과·내과·가정의학과 등 4개과로 한정해 건강보험 등 국내 공공의료체계에는 영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반대 여론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두고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개원을 찬성하는 측은 병원 개원 후 휴양·의료·헬스케어·연구개발(R&D)이 연계된 제주도의 의료복합단지 조성사업이 탄력을 받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발길이 끊긴 중국인 의료관광객이 다시 한국을 찾는 촉발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국내 법인이 운영하는 병·의원은 아무래도 대외적 정치 이슈 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중국 자본이 직접 들어와 운영하기 때문에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의료관광 사업의 불확실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반대 측은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시발점으로 영리병원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 의료보험 체계가 무너져 의료비가 폭등하고 의료서비스 양극화 사태가 촉발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리병원 논란은 시작된 것은 2002년 12월 김대중 정부 당시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경제자유구역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이 법은 외국인이 경제자유구역 안에서 외국인 전용 영리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영리병원은 투자병원,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투자개방형 병원, 영리 의료법인 등 여러 명칭으로 혼용된다. 제주도와 6개 경제자유구역(인천 청라·송도·영종도, 부산·진해(창원), 광양만권(여수·순천·광양·하동), 황해권(당진·아산·서산·평택·화성), 새만금군산(군산·부안), 대구경북권(대구·포항·구미·영천·경산)에 한해 외국인 투자비율이 출자총액의 50% 이상이거나, 자본금이 미화 500만달러 이상인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다.
일반 병·의원과 다른 것은 영업이익의 활용처다. 의료재단이나 공익재단, 학교재단이 설립한 병원은 운영을 통해 얻은 이익을 의료시설 확충, 인건비, 연구비 등 병원 설립 목적에 맞게 재투자해야 한다. 일반 개인의원이나 병원은 소유주(설립자가 의사)가 이익을 가져가도 되지만 주식회사 형태로 이익을 투자자에게 배당할 수 없다.
반면 영리병원은 기업처럼 이윤을 남겨 투자자에게 배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의사가 아니더라도 외부인이 투자 차원에서 병원을 개원·운영할 수 있다. 현행법은 의사, 의료법인, 사회복지법인, 학교법인만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