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소송은 의료행위의 전문성과 난해함 때문에 의료인이 패소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최근 의료과실로 환자를 식물인간에 이르게 한 의료진과 병원의 책임을 가중시키는 판례가 연달아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달 서울북부지법 민사12부는 대장내시경검사 중 의료진 과실로 식물인간이 된 한 씨(66)가 의료진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의료진은 2019년 9월까지 3억8000만원을 배상하고 이후 한 씨가 사망할 때까지 매달 4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의료진의 100% 책임을 인정한 사례다. 기존 판례에서는 의사의 명백한 실수라도 과실의 절반만을 인정했다.
한 씨는 2014년 4월 동네 병원에서 대장내시경을 받다 의사 A 씨의 실수로 대장에 5㎝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A 씨는 한 씨가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자 놀라 병원장 B 씨에게 수술을 넘겼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한 씨는 상급병원으로 옮겨졌다.
상급병원 의사 C 씨는 숨이 차다고 호소하는 한 씨의 대장에서 구멍을 발견하고 접합을 시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심정지가 발생했다. C 씨는 호흡기에 관을 삽입하려 했지만 연달아 실패, 20여 분간 뇌에 산소공급이 차단됐고 한 씨는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재판부는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해 의사 A, B, C씨가 과실에 대한 책임을 100% 지도록 했다. 이전 의료사고 소송에서는 어렵고 위험한 의료 행위의 특성상 의사의 책임을 30~70% 수준만 인정하는 의료행위 책임제한 법리가 적용됐다.
재판부는 “평소 대장질환이나 지병이 없던 한 씨가 의료진 과실로 천공을 입었고, 추가검사 도중 쇼크를 일으켜 최종적으로 뇌 손상을 입었다”며 “피고들의 책임을 제한하지 않는 게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의료과실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퇴원을 강요한 대학병원이 원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패소한 사례도 나왔다. 청주지방법원은 병원이 환자를 상대로 제기한 퇴거 등 청구소송에서 병원 패소 선고를 내렸다.
2012년 2월 A씨는 B병원에서 유도분만으로 출산한 후 지혈이 되지 않아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됐다. 이후 병원 중환자실에서 연명치료를 받았다. A 씨 가족은 B병원을 상대로 의료과실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B병원의 과실을 인정해 1억8000여만원 지급 선고를 내렸다.
B병원은 판결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A씨 가족 측에 지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에게 의료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환자가 소생 가능성이 없어 보존적 치료만 가능한 만큼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게 적합하다는 이유로 사실상 강제퇴원을 요구한 셈이다.
A씨 가족 측이 따르지 않자 병원은 환자의 퇴거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의료계약 해지 통보 이후 1억900여만원에 이르는 진료비도 요구했다.
이에 1심 재판부는 “의료계약은 당사자가 언제든 해지할 수 있지만 해당 병원의 표준업무에 해당하지 않거나, 일반병원에서 진료가 가능하다는 주장만으로는 해지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의사가 의무를 다하지 않은 탓에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신체 손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후유증 치유나 악화방지 치료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병원은 어떠한 수술비와 치료비 지급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의료소송은 피해자인 환자가 이기기 힘든 대표적인 소송으로 꼽힌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판사가 의료 분야의 비전문가인 만큼 판사에게 내용을 쉽게 설명해 이해시킬 수 있는 변호사가 의료소송에서 유리한데, 이런 변호사는 대개 수임료가 높은 병원 쪽에 선다”며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는 의료소송을 버티고 대형로펌을 쓸 수 있는 병원 측의 승소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의 판례 경향이 의사들의 진료행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신해철 씨 사망사건이나, 신생아 감염 사망 사건 등으로 의료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법원 판결도 이를 반영하는 듯한 모양새”라며 “의료사고를 우려한 의사들이 위험한 의료행위를 아예 피하거나, 치료를 소극적으로 하게 되면 결국 피해는 환자들이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