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기에 접어든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40여 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선 진료현장의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사전에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밝힌 환자에 대한 정보조회시스템이 미비한 데다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위원회를 갖춘 병원도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본격적으로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 이른바 ‘웰다잉법’에 따르면 따르면 존엄사를 희망한 환자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의 연명의료를 받지 않거나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양공급, 수분·산소공급, 체온유지, 배변 및 배뇨 도움, 진통제 투여 같은 기본적인 고통완화 조치는 중단할 수 없다.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으로부터 존엄사 대상, 즉 현재 임종 과정이라는 의학적 판단을 받아야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다. 임종 과정은 치료해도 회생할 가능성이 없거나,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의미한다.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인데 환자나 보호자가 요구한다고 해서 치료를 중지하는 것은 자살방조에 해당한다. 연명치료 중단 대상이 아닌데 치료를 중단한 의사는 1년 이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19세 이상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거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전무할 땐 환자 가족 중 2인 이상의 진술을 바탕으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한다. 법 시행 이후 이달 15일까지 말기·임종기 환자 1170명이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연명의료중단 의향을 밝힌 환자 정보를 조회하는 ‘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이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일선 진료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전에 활용되던 ‘심폐소생술 거부’(DNR) 정보를 연명의료정보시스템에 옮겨야 하는데, 아직 시스템이 제대로 호환되지 않아 많게는 1000건 이상 수작업으로 옮겨야 한다. 시스템 사용 매뉴얼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관련 교육도 부족한 실정이다.
또 환자가 연명의료 관련 서류를 작성해 등록했더라도 갑작스럽게 실려 온 응급시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없는 연동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아 의료진이 의학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시스템 연동이 됐더라도 응급실로 호출된 전문의가 환자의 연명의료계획서를 확인하기 위해 공인인증서, 환자주민등록번호 등을 전산시스템에 직접 입력해야 연명의료행위 여부를 결정 및 시행할 수 있다. 1~2분내 조치를 취해야하는 응급 환자를 두고 실시하기에는 비현실적이다.
환자 관련 단체들은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밝히기 전 임종기에 들어가면 환자 대신 동의를 구해야 하는 가족의 범위가 너무 넓다고 지적한다. 현행법에서는 환자 의식이 없을 때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모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 고령자의 경우 자녀와 손주까지 모두 합치면 동의 대상이 수십 명에 이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에 해당되는 모든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연명의료 중지 동의 대상을 2촌 이내 가족으로 하되 2촌 이내 가족이 없다면 직계 존·비속의 동의를 구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하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병원은 111곳으로 전체 병원급 이상 의료 기관의 3.3% 수준에 그치고 있다. 현행법에선 윤리위를 설치한 의료기관에서만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거나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지나치게 복잡한 서식과 의료진에 대한 과도한 처벌 규정도 논란거리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내과 교수 “연명의료 서식 작성을 위한 등록사이트에 가입하려면 총 16단계가 필요해 의료기관 전담 근무자들의 고충이 크다”며 “정보 입력 절차가 까다롭다보니 의료현장에서는 법 적용을 포기하거나 법 절차에만 맞춘 형식적 설명과 서명만이 이뤄질 뿐”이라고 지적했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명시된 의료진 처벌 조항이 부담스러워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H 대학병원 관계자는 “연명의료와 관련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상황 속에서 의료진은 부담감 속 방어진료라는 대응책을 쓸 수밖에 없다”며 “가뜩이나 법 자체도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결되는 등 매우 어렵고 절차도 복잡해 법과 의료현장의 간극이 지속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