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0명의 목숨을 앗아간 밀양 세종병원 화재사건으로 의료계 내 안전불감증이 드러난 가운데 제2, 제3의 밀양화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장 안전해야 할 병원에서 화재가 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는 의료장비가 하루종일 가동되다보니 전력 과부하, 누전, 합선에 의한 화재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 병원 진료나 불친절에 앙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방화하는 사례도 적잖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도 정부의 느슨한 땜질 정책 탓에 상당수 요양병원과 지방 중소병원은 스프링클러 등 화재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않거나 의료기관 인증평가를 회피하는 등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국내에선 4~5년에 한 번꼴로 환자나 의료진이 사망하는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1993년 4월 19일 논산 정신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34명이 사망했다. 여성 환자 수용실 사물함 부근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됐고, 병동관리인이 여자 환자에게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고 진술해 담뱃불로 인한 화재로 추정됐다. 규정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을 수용해 사망자가 급증한 사실이 드러나 병원장 등이 구속됐다.
2007년 9월엔 병원 치료에 불만을 품은 한 남성이 서울 구로구 K정형외과에 불을 질렀다가 인접한 M성형외과도 피해를 봤다. 성형외과 사무장 이모 씨가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이 곳 4층에 있던 환자 배모 씨(여)는 불과 연기를 피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가 목숨을 잃었다.
2010년 11월 12일엔 포항 인덕노인요양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1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불은 1층 사무실에서 최초로 발화했고, 건물 일부를 태운 뒤 30여분만에 진화됐다. 하지만 1층에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 환자 11명이 입원했고, 이 중 10명이 미처 대피하지 못해 연기에 질식, 사망했다. 2013년 경기도 포천 요양병원에서 불이나 한쪽 손이 침대에 묶여 있던 치매 환자가 숨졌다.
2014년엔 전남 장성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에서 화재가 발생, 입원 환자 20명과 초기 진화에 나섰던 간호조무사 김모 씨가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망 환자 대부분이 거동이 불편한 고령 치매·중풍 환자였다. 당시 다용도실에 쌓여있던 매트리스가 불에 타면서 유독가스가 나와 피해가 컸다.
지난 1월 26일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사건은 의사 1명, 간호사 1명, 간호조무사 1명을 포함한 50여명이 사망하고 142명이 부상당한 최악의 병원 재난사고였다. 불법 증축으로 대피로가 확보되지 않았고,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아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2018년), 차의과학대 분당차병원(2010년), 서울적십자병원(2008년) 등 대형병원에선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지만 상대적으로 잘 갖춰진 화재안전 시스템 덕분에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가 많은 요양병원이나 지방 중소병원은 안전설비 미비, 상주인력 부족, 비상 매뉴얼 부재 등으로 여전히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중소병원은 요양병원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정부가 장성 요양병원 화재 이후 사후약방문 식으로 요양병원 규제만 강화한 탓이다. 최근 소방청이 전국 1800여개 중소병원을 조사한 결과 20%가 제대로 된 소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시설법상 수용인원 100명 이상인 문화·집회·종교·운동시설은 스프링클러, 비상경보기 등 안전설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의료시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의료기관은 법적으로 바닥면적이 1000㎡ 이상인 경우에만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된다. 이번에 화재가 났던 밀양 세종병원은 바닥면적이 394.87㎡여서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다수 중소병원도 이에 해당된다.
요양병원의 경우 2014년 장성 효사랑 요양병원 화재사고를 계기로 2015년부터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으며 오는 6월까지 3년간 유예기간을 뒀다. 바닥면적 합계가 600㎡ 이상이면 스프링클러를, 600㎡ 미만이면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 다만 아직도 의무 설치 대상인 요양병원 1532개소중 990개소(64.6%)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상태다. 즉 요양병원 10곳 중 3곳은 화재시 초기 진압에 효과적인 스프링클러가 아직도 없는 셈이다.
유독가스를 차단·배출·희석하는 제연설비의 경우 요양병원은 규모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일반병원은 바닥면적이 1000㎡ 이상이거나 6층 이상일 때에만 설치가 의무화된다.
화재 등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인력도 부족한 실정이다. 의료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야간이나 공휴일에 당직자 한 명을 둬야 한다. 이 조항은 2014년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이후 마련됐다. 하지만 한 명으로는 화재신고나 방화셔터 작동 등 초동대처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 요양병원 입원자는 대부분 거동이 불편해 화재 시 대피에 소수 당직 의료인만으로는 짧은 시간 내 환자를 대피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중소병원은 의료기관 인증 의무도 없어 화재에 더 취약하다. 의료기관 인증은 화재 안전관리 규정 및 계획, 소방시설 설치, 안전교육, 소방훈련 등 항목을 평가한다. 최근 잇따른 의료사고로 인증평가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많지만 여전히 환자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기관 인증이 필수인 의료기관은 상급종합병원, 전문병원, 전공의 수련병원, 연구중심병원, 정신병원 등이다. 의무 대상이 아닌 일반병원은 10% 정도만 의료기관 인증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 중소병원 관계자는 “중소병원은 경영 문제로 재난관리 및 환자안전을 위한 인력 및 설비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스프링클러설비를 갖추려면 100병상당 최소 10억원이 소요되는데 현재 상황에선 너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중소병원의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 설치비용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