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회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척도와 권위를 따르는 자들을 ‘빛의 자녀들’로, 자신의 이익 외에는 어떤 기준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어둠의 자녀들’로 규정했다.
니버는 개인으로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특정 집단에 속하게 되면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 19세기의 낭만주의, 마르크스 유물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인간의 본성과 운명 I, II’를 내놓으면서 사상가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니버는 미국의 독일이민 2세로 에덴신학교와 예일대 신학부를 나와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목사로 활동했다. 1928년 뉴욕 유니온신학대 교수로 초빙돼 기독교윤리학과 실천신학 강의로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중반 유니온신학대에 유학했던 강원용 목사(1917~2006)의 스승이기도 하다.
최근 그의 저서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1944년 초판, 1959년 2판 출판)이 국내서 번역 출판됐다. 기독교 현실주의자인 저자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기독교 사회윤리학 명저다. 책 제목은 누가복음 16장8절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라는 문구에서 따왔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둠의 자녀들’ 때문이지만, 슬기롭게 자신들의 이상을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구조화하고 보편화하는 데에 실패한 ‘빛의 자녀들’의 어리석음 탓도 크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빛의 자녀들은 보편적인 가치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이기심을 통제하거나 포기할 의도를 갖추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순수함 때문에 때로는 이기심의 충동적인 힘을 과소평가하거나 이성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는 등 순진한 낙관주의에 자주 빠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빛의 자녀들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둠의 자녀들은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은밀하게 채우며 치명적 해악에 대한 가능성을 언제나 남겨둔다. 점차 어둠의 자녀들의 자기이익 추구가 민주주의 체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구조화될 때, 민주주의는 근간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니버는 이미 1940년대에 예견했다.
니버는 선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성공할 것이라는 도덕적 낙관주의(낭만주의)나 그 반대로 이런 것은 아예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주의를 경계했다. 기독교적(성서적) 신앙의 사랑을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려면 기독교 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를 위해 “빛의 자녀들은 어둠의 자녀들이 가진 지혜로 무장해야 한다. 하지만 어둠의 자녀들이 가진 악의(惡意)로부터는 자유롭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빛의 자녀들이 도덕적 이상을 견지하되 어둠의 자녀들이 가진 뱀의 지혜로 어둠의 자녀들을 제압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파다. 물론 이런 과정이나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지만 사적 이익을 누르고 회유해서 공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는 가톨릭교의 독선과 봉건적 체제, 부르주아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등을 비판했다. 니버는 기독교가 ‘신비적’ 종교가 아니라 ‘신화적’ 종교의 유산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에 기술된 상징이나 신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으로 이해할 경우 ‘문자주의’나 ‘반계몽주의’의 미신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수의 인격과 하나님의 신성이 동일하다는 신화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관점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을 조장하지 않는 문화적·종교적·도덕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사회는 가장 번성한다. 정치에서 도덕적 감상주의나 도덕적 비관주의는 전체주의적 정권을 조장한다. 정당한 정부의 권력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거나, 그 반대로 정부에 대한 비난과 갈등을 일으켜 무정부 상태를 제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적인 정치적 권위라고 믿게 되는 순간 전체주의가 형성되는 호기가 마련된다.
니버는 또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산물로 민주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같은 가치로 개념짓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양극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순수한 본래 취지가 실현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하는 대목이다.
임성빈 장로회신학대 총장은 “니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 빛의 자녀들로서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 욕구 추구에 열심일 가능성이 높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기이익을 향한 경향성을 거슬러 타자를 존중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게 유도하는 게 니버 사상의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읽을 책으로 참모들은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추천했다. 이 전 대통령이 니버의 저서들에 담긴 메시지를 깊게 받아들였다면 최근의 불행한 정국이 전개되지 않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라인홀드 니버 지음, 오성현 번역, 종문화사, 232쪽,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