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8000만원의 전문직 종사자 윤모 씨(46)는 얼마 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350만원을 주고 프리미엄 건강검진을 받았다. 처음엔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국가 건강검진보다 검사항목이 많아 안심이 됐고 마치 ‘왕’처럼 응대해주는 의료진의 서비스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2년째 VIP검진을 받고 있는 그는 내년에도 건강검진에 아낌없이 투자할 계획이다.
임대주택에 홀로 거주하는 류모 씨(69)는 몇 년째 건강검진을 받지 않고 있다. 인근 보건소에서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공문을 보내왔지만 3교대로 아파트 경비근무를 서느라 시간을 내기 힘들다. 질병이 발견돼도 어차피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건강검진에 아예 관심을 끊었다.
한국인은 유독 건강염려증이 심해 건강검진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조사결과 1년 동안 건강검진에 소요되는 비용은 최대 18조5000억원에 달했으며, 개인은 1년간 전체 의료비의 5분의 1을 건강검진에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검진은 건강보험공단이 의료보험 가입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일반검진과 대학병원이 맞춤 형식으로 제공하는 민간검진으로 나뉜다. 일반검진은 일부를 제외하고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반면 대학병원들이 내놓는 검진 상품은 주고객이 고소득층이어서 상당히 비싼 편이다.
문제는 건강검진도 소득 수준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돼 일부 고소득층은 과도하게 비싼 검진을 받는 반면 상당수의 저소득층은 기본적인 건강보험 검진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건강 불평등을 야기한다. 소득이 적을수록 건강검진 수검률이 낮고 암, 비만, 고혈압 발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최근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기대수명 자료에 따르면 고소득층은 저소득층보다 6.6년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 10월 김광수 국민의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건강보험료를 10만원 이상 납부한 사람의 일반건강검진 수검률은 78%였지만 1만원 이하 납부자는 63%에 그쳤다.
저소득층은 건강검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생계활동으로 검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지역내 공공병원이나 보건소에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해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류 씨의 사례처럼 건강검진 자체는 무료지만 추후 소요되는 치료비나 병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검진 자체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국가 건강검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도 수검률을 낮추는 요인이다. 현행 제도 아래에선 검진 결과에 대한 후속 상담이나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검사결과서 한 통만 달랑 우편으로 날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2차 검진률은 2013년 34.2%, 2014년 35.3%, 2015년 34.1%, 2016년 38.2%로 4년간 40%를 채 넘기지 못하고 있다.
무료검진이 원칙인 국가검진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유료 추가검진을 유도하는 등 도덕적 해이도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최근 5년간 부당검진으로 인한 환수결정 건수는 2013년 30만3746건, 2014년 52만8589건, 2015년 37만4016, 2016년 47만8664건에 달했다. 열악한 건강검진과 불친절한 응대 등 질 낮은 서비스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광수 의원은 “저소득층의 낮은 건강검진 수검률은 질병의 조기 발견과 치료를 어렵게 한다”며 “이럴 경우 건강 악화, 가계소득 감소, 건강검진 거부 등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소득층은 받지 않아도 될 검사를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다. 인구고령화로 의료 패러다임이 질병 치료에서 예방으로 전환되자 건강검진 고객을 끌어들이려는 대형병원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빅5(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연세대 세브란스병원·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한 상급종합병원들은 ‘프리미엄’, ‘플래티넘’이라는 간판을 달고 잇따라 고급 건강검진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국가 건강검진에 대한 불신 탓에 고소득층은 민간 대학병원의 검진프로그램을 선호한다. 대학병원의 일반 건강검진은 기본 신체측정, 혈액검사, 위내시경, 상복부초음파, 심전도검사, 흉부 컴퓨터단층촬영(CT), 폐기능검사, 안과검사, 소변·대변검사 등을 실시하며 비용은 60만~70만원선이다.
여기에 세부 부위별 CT, 뇌 자기공명영상(MRI), 대장내시경, 종양표지자검사, 의료진 정밀상담 등이 추가된 프리미엄 건강검진 비용은 300만~600만원에 달한다.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3박4일간 이뤄지는 숙박형 건강검진의 경우 숙박비가 별도로 포함돼 700만원을 훌쩍 넘긴다. 개인 프라이버시를 보장받길 원하는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하는 VVIP 건강검진은 1000만원 이상이다. 업계에서 ‘건강검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소득에 맞게 비싼 건강검진을 받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고가검진의 실효성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K대학병원 교수는 “건강검진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를 많이 받을수록 오류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CT나 MRI 촬영 과정에서 불필요한 방사선에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고위험군이 아닌 건강한 사람의 검진 항목에 양전자단층촬영(PET-CT)이 포함됐다면 과잉진료일 확률이 높다”고 강조했다.
또다른 의료계 관계자는 “대형병원 건강검진엔 쓸데없이 많은 혈액검사가 포함돼 있고 심전도, 면역혈청검사, 유전자검사 등은 특정 질환 고위험군이 아니라면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항목”이라고 말했다.
꼭 큰 병원에서 검진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루 수십 수백명의 수검자를 공장 컨베이어밸트 돌아가듯 검사하는 대형병원보다 수검자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과거 병력이나 가족력을 알고 있는 주변 단골병원 의사가 더 정확하다는 논리다.
김광수 의원은 “건강검진을 위해 평일 하루 반나절 쉬는 것도 저소득층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며 “소득 격차에 따른 수검률 편차를 줄이기 위해 국가 건강검진 기관의 서비스 질을 철저히 평가하고 공휴일 검진기관 확대, 도서벽지 거주자를 위한 이동검진서비스 같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