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타고 국내 대형 의료기관들이 첨단 IT(정보기술)에 바탕을 둔 ‘스마트병원’ 구축에 나서고 있다. 정권 교체로 원격의료 정책이 동력을 잃자 그동안 협업하던 IT업체와 새로운 수익모델을 착안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대학병원들의 자구노력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빅데이터와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의료IT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는 보안 문제에 취약하고, 명확하지 않은 수익구조 탓에 무리하게 투자하면 병원 재정에 부담만 줄 것이라고 우려한다.
100세 시대 ‘웰빙’ 열풍, 환자정보 빅데이터화, 스마트폰 대중화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기존 의료서비스에 IT기술을 접목한 디지털 헬스케어가 주목받고 있다. 스마트폰앱을 활용하면 환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 환자 유입에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전망에서다.
특히 심장질환이나 당뇨병 등 중증 만성질환의 발병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스마트병원’은 선택 아닌 필수가 됐다. 병원 전용앱이나 진료 관련 IT서비스가 없을 경우 젊은 환자들이 고루하거나 뒤처지는 병원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것도 그 요인이다. 한편으로는 ‘저 병원도 하는데 우리도 해야지’라는 일종의 경쟁심리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을 확장하는 데 한몫했다.
가장 먼저 경쟁의 포문을 연 곳은 서울대병원이다. 이 병원은 2012년 SK텔레콤과 합작투자해 자회사인 헬스커넥트를 설립했다. 당시 디지털 콘텐츠 등 무형자산 97억5000만원과 현금 60억원을 출자해 현재 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013년 헬스커넥트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기반 자가 건강관리서비스인 ‘헬스온(Health-On)’을 출시했다. 이 서비스는 하루 걸음걸이 수·운동량·혈압 및 혈당 등이 자동으로 데이터화돼 스마트폰앱을 통해 전송되고, 그에 맞는 식이요법과 건강정보 등이 사용자에게 제공된다.
또 분당서울대병원은 2013년 환자에게 진료 일정과 동선을 안내하는 ‘베스트가이드’ 앱을 출시했다. 이 앱은 블루투스 비콘(근거리 무선통신 장치) 기술을 기반으로 3D지도 기술이 접목돼 환자가 병원에 들어서면 앱이 자동 구동되고 서비스 위치를 안내한다.
차의과학대 강남차병원은 올해 초 모바일 의료앱 ‘Hi-CHA(하이차)’를 출시했다. 하이차는 모바일 진료비 결제, 예약·확인, 대기표 발권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 류상우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환자들의 요구가 까다로워지고 있어 의료IT 서비스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며 “앱을 통해 환자의 불필요한 대기시간과 동선을 단축하면 병원 입장에서도 운영비용 감소 및 이미지 제고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 생활습관 관리가 중요한 당뇨병은 스마트폰앱 서비스가 가장 잘 이뤄지는 분야다. 올해 서울대병원 헬스커넥트는 헬스온Glucose(헬스온G), 서울아산병원은 내 손안의 차트, 강북삼성병원은 헬스스위치(Health switch)를 각각 출시했다.
경희의료원도 2010년 8월 국내 최초로 ‘당뇨병 수첩’앱을 개발했으며 현재까지 버전을 업그레이드해 당뇨병 환자에게 무상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IT가 환자정보 유출 등 보안문제, 막대한 예산 부담 등으로 되레 병원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부분의 스마트폰앱 서비스는 방대한 양의 환자정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경우 일반PC보다 보안에 취약하고, 여러 환자들의 정보가 취합된 빅데이터 특성상 한번 해킹에 뚫리면 줄줄이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환자정보를 포함한 헬스케어 데이터는 일반 개인정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돼 국제 해커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꼽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며 “특정 기업이 환자의 의료정보를 동의 없이 제품개발 등에 악용할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최근 3년간 헬스케어 데이터유출 사고가 300% 증가했다. 국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 2013년 데이터유출 사고의 43.8%가 의료 분야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2012년(34.9%)보다 10%p가량 증가한 수치다.
비용 대비 효과도 아직 100% 장담하기 어렵다. 시스템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IT기술과 연계된 병원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수십,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시스템을 구축해도 애매한 수익구조 탓에 실질적인 매출 상승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게임이나 기타 앱은 광고로 수익을 창출하지만 병원용 앱은 영리화 논란과 각종 규제 탓에 광고수입을 올리기 힘든 구조”라며 “결국 의료정보시스템을 해외에 수출해야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분당서울대병원 등 일부 의료기관을 제외하면 먼 미래의 일일 뿐 구체화된 것은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앱 이용자가 저조한 것도 부정적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수도권 한 대학병원은 올해 초 스마트폰으로 건강검진 정보를 실시간 확인하고 예약까지 할 수 있는 모바일앱을 출시했지만 다운로드 건수는 2000여건도 채 되지 않고 있다. 다른 병원 모바일앱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원 관계자는 “병원이 돈을 좇는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부정적인 인식이 디지털 헬스케어 활성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국내 디지털헬스케어 시장 선두주자였던 헬스커넥트마저도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헬스커넥트는 설립 당시 2014년 말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고, 2015년엔 매출 1591억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서비스 개시 이후 꾸준히 적자를 기록해왔고 지난해엔 13억원의 적자를 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헬스커넥트는 당초 계획과 다르게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금부족으로 현금을 출자하면서 원래 의료사업에 투자해야 할 재원까지 빼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정희 건강세상네트워크 위원은 “디지털 헬스케어사업처럼 당장의 수익이 불투명한 사업에 재원을 무한정 투입하는 것은 병원의 재정건전성을 악화시켜 그에 따른 부담을 환자에게 가중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