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직무 대체 우려” vs “전문성·안전성 강화 기회”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의사 ‘왓슨’이 가천대 길병원·건양대병원·대구가톨릭대병원 등 국내 대학병원에 속속 도입돼 진단과 치료 관련 의료진에 의견을 제시하는 가운데 신약개발·의약품 조제 등 제약 부문까지 인공지능 로봇이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 사람의 일을 대체해 일자리가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와 연구원·약사 등의 직무 전문성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교차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의료·제약계 직업 변화와 관련 구체적인 대응 방안은 전세계적으로 아직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딥러닝이 가능한 왓슨은 1500만페이지 분량의 의료정보를 스스로 학습한다. 왓슨을 도입한 병원은 이 인공지능이 내놓는 진단법과 인간 의사의 판단이 대대분 일치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은 미국 존스홉킨스병원·클리블랜드클리닉 등에 이어 지난해 1월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 루치오니그룹(Loccioni Group)의 의약품 조제 로봇인 ‘아포테카케모’(Apoteca Chemo)를 도입했다. 이 로봇은 약사가 항암주사제 조제 시 발생하는 유독한 증기 흡입으로 인한 안전사고 위험을 없애고, 의약품 조제 생산성을 높여준다. 삼성서울병원에 따르면 아포테카케모는 외래 암환자 의약품 조제 4건 중 1건을 처리해 약사 두 명의 몫을 해내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6~9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카이스트·서울대 등 9개 기관의 인공지능·로봇 전문가 21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2025년에 인공지능·로봇이 약사 일자리를 대체하는 비율은 68.3%로 다른 보건의료 전문직인 간호사(66.2%)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치과의사(47.5%)·전문의(42.5%) 등 의사에 비해 다소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고용정보원은 약사나 간호사 등은 의사 처방이나 지시에 따른 업무가 많고, 상대적으로 기계적인 업무 비중이 높아 인공지능·로봇의 대체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프레드 에켈(Fred Eckel) 미국 노스캐롤리나대 약대 명예교수는 2013년 3월 약사신문인 ‘파마시타임즈’(Pharmacy Times)에 ‘왓슨이 정말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을까’(Can Watson Really Practice Medicine)를 주제로 기고한 칼럼에서 “왓슨은 의료행위를 하지 않고 단지 의료인이 의료행위를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왓슨은 약사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약사를 더 훌륭한 약사로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인공지능을 친구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적으로 만들 것인지 현명하게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베스 로프그렌(Beth Lofgren) 약학박사는 2015년 9월 파마시타임즈에 ‘로봇이 약사의 직무를 대체할 수 있을까?’(Could a Robot Do a Pharmacist‘s Job?)를 주제로 기고한 칼럼에서 “약사의 일이 단지 조제실에 머물면서 처방전에 따라 약을 만드는 데 그친다면 로봇이 이를 쉽게 대체할 것”이라며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로봇이 그대로 따라하기 어려운 분야로 약사는 의사 등 다른 의료진과 업무 관련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환자의 약물치료에 더 깊이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국내외 약사 사회에서 위기감이 조성되는 것과 달리 신약개발 분야는 초기 연구단계의 효율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제약사인 미국 화이자, 머크(북미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선 MSD) 등은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미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다. 신약개발 관련 빅데이터를 분석하면 모든 경우를 실험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화이자는 지난해 12월 IBM의 왓슨을 도입해 면역항암제를 개발하기로 했다. 왓슨이 보유한 실험 및 임상시험 데이터·의학서적 관련 3000만개의 리포트 자료와 자사가 가진 연구개발 정보를 취합해 빠르게 분석하고 객관적인 연구가설을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머크는 2015년 6월 아톰와이즈(Atomwis)의 인공지능 ‘아톰넷’(AtomNet)을 도입해 신약후보물질을 효율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아톰넷은 많은 양의 표적물질 정보를 학습해 연구자가 가장 합리적으로 약물의 분자구조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인공지능 도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지난달 “보건복지부 등 정부기관과 협력해 국내 제약사가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신약개발지원센터를 연내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배영우 협회 R&D정책위원회 4차산업 비상근 전문위원(뇌과학 전문기업 아이메디신 대표)은 “신약개발에는 공공 자료인 △과학논문 △특허정보 △유전자정보 △약물정보 등과 기업 고유의 자산인 △화합물 구조 △임상데이터 △전자연구노트 등 다양한 도메인의 빅데이터가 필요하다”며 “관련 빅데이터를 유통할 수 있는 인공지능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