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내 신경을 따라 흐르는 전기신호를 개선하는 전자약(electroceuticals)이 크론병(염증성장질환)·류마티스관절염 등 난치성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미국 바이오벤처 셋포인트메디칼(SetPoint Medical)은 지난해 중증 류마티스관절염 환자 17명과 중증 크론병 환자 8명을 대상으로 한 2건의 초기 임상연구(pilot study)에서 개발 중인 전자약의 효과와 안전성을 확인했다.
지난 5월 4일 세계 과학학술저널인 ‘네이처’(Nature) 뉴스엔 약 5년전 이 회사의 류마티스관절염 임상에 참여해 목 뒤에 전자약을 이식한 네덜란드 여성 A씨(70세)의 치료사례가 소개됐다. 이 환자는 전자약 치료로 고용량 스테로이드요법을 중단하고, 운동지도사(fitness instructor)로 복귀했다. 아직도 매주 메토트렉세이트(methotrexate, MTX) 주사제를 투여하고, 매일 디클로페낙(diclofenac) 성분의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를 복용하고 있긴 하지만 스테로이드를 피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큰 성과로 여겨진다.
전자약은 생체전자의약품(bioelectronic medicine)의 줄임말로 뇌와 신체기관 간 전기언어(전기신호)를 이용해 완치가 어려운 파킨슨병·천식·고혈압·당뇨병 등 다양한 만성질환을 치료한다.
이 약을 몸에 이식하면 신경을 통과해 질병으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전기신호를 수정할 수 있다. 이 기술은 특정 신경세포(뉴런)를 표적하므로 전기자극을 이용한 기존 치료법인 심박조율기(부정맥 치료, 1950년대 개발)·뇌심부자극술(뇌전증 치료, 1990년대 개발) 등이 신체조직의 넓은 부분에 작용하는 것보다 정밀하다.
셋포인트메디칼은 2013년부터 글로벌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의료기기 제조사인 코비디엔(Covidien, 2014년 메드트로닉에 인수됨) 등으로부터 총 2억700만달러(약 230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전자약을 개발하고 있다.
폴 탁(Paul P. Tak)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의학연구센터(Academic Medical Center of University of Amsterdam) 류마티스학 교수를 주축으로 한 공동연구팀은 활성 류마티스관절염 환자 총 17명에 셋포인트메디칼의 전자약을 목 뒤에 이식하고 84일간 경과를 관찰했다.
1그룹에 속하는 환자 총 7명은 종양괴사인자(TNF-α, tumor necrosis factor-alpha)억제제 등 생물학적제제를 투여한 적이 없으며, 메토트렉세이트 치료에 실패했었다. 2그룹에 속하는 총 10명은 메토트렉세이트를 비롯해 TNF-α억제제·인터류킨6(interleukin-6, IL6)억제제 등 두 가지 이상의 생물학적제제를 투여받았지만 질환의 활성도가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었다.
연구 결과 전체 환자(17명) 중 12명에서 전자약의 치료효과가 나타났으며, 나머지 5명은 치료에 반응하지 않았다. 전자약을 목 뒤에 이식하면 발작·우울증·심박동수감소·위산분비증가 등이 발생할 우려가 제기됐으나 이 임상에선 이상반응으로 치료를 중단한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1차 평가변수로 이식 42일째에 혈청 C반응성단백(C-reactive protein, CRP) 농도를 이용해 주요 28개 관절의 질환활성도(DAS28, Disease Activity Socre of 28 joints)를 측정한 결과 전체 환자의 평균 DAS28-CRP 점수는 4.16점으로 기저치(baseline, 이식하기 21일전) 6.05점 대비 1.89점 감소했다.
체내 면역반응이 과다하게 일어나면 혈청 C반응성단백 수치가 높아지는데 DAS28-CRP 점수가 5.1점을 넘으면 질환활성도가 높고, 3.2점 이하이면 활성이 낮은 것으로 해석된다. 관해(remission, 질환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상태)는 점수가 2.6점 미만일 때를 의미한다. 이식 42일째에 1그룹의 28.6%가 관해에 도달한 반면, 2그룹에선 한 명도 관해를 보이지 않았다.
같은 기간 이들 환자의 말초혈액(단핵구)의 평균 종양괴사인자(TNF, tumor necrosis factor) 생성량을 측정한 결과 2900pg/㎖(기저치, 이식 21일전)에서 1776pg/㎖(이식 42일째)로 떨어졌다. TNF가 지나치게 많이 생성되면 자가면역질환을 유발하거나 악화할 수 있다.
이식 42일째에 전자약의 전원을 14일간 끈 결과 전체 환자의 평균 DAS28-CRP 점수가 4.96점으로 소폭 상승했으며, 이식 56일째에 전자약의 전원을 다시 켜고 나니 4.16점으로 되돌아왔다. TNF 생성량도 DAS28-CRP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이는 전자약이 질환활성도를 감소시켰다는 의미다.
2차 평가변수로 이식 42일째에 ACR20·ACR50·ACR70을 분석한 결과 1그룹은 각각 71.4%, 57.1%, 28.6%이었다. 2그룹은 70%, 30%, 0%로 확인됐다.
ACR20은 미국 류마티스학회(ACR, American College of Rheumatology)가 규정한 류마티스질환 치료법의 유효성 평가지수 중 하나로 총 7가지 항목 중 △통증 관절수 △종창 관절수 등 증상 관련 2가지 항목이 모두 20% 이상 개선되고 △환자 자신의 통증 평가(시각상사척도인 VAS 이용) △환자의 질환 활동성 평가(VAS 이용) △의사의 질환 활동성 평가(VAS 이용) △환자의 신체기능 평가(VAS 이용) △C반응성단백(CRP, C-reactive protein) 또는 적혈구침강속도(ESR, erythrocyte sedimentation rate) 급성기반응물질 측정 등 나머지 5항목 중 3항목 이상이 20% 이상 개선된 상태를 의미한다. ACR50, ACR70은 관련 증상이 50%, 70% 이상 개선된 상태를 뜻한다.
연구결과는 ‘전자약이 류마티스관절염 환자의 미주신경을 자극하면 병인이 되는 사이토카인 생성을 멈추고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Vagus nerve stimulation inhibits cytokine production and attenuates disease severity in rheumatoid arthritis)는 제목으로 미국국립과학원(NAS)이 발간하는 국제학술지인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PNAS)’ 지난해 6월호에 실렸다.
유럽 중등도 및 중증 활성 크론병 환자 8명에 셋포인트메디칼의 전자약을 시술한 또다른 연구에서는 6명에서 효과가 나타났다. 이 중엔 TNF-α억제제 치료에 실패한 환자가 포함됐다. 치료반응을 보인 6명은 이식 16주 후에 크론병활성도지수(Crohn’s Disease Activity Index, CDAI)가 평균 70점가량 감소했다. CDAI 점수가 450점이 넘으면 증상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며, 관해는 150점 미만일 때로 정의한다.
연구결과는 2016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소화기학회(United European Gastroenterology, UEG) 학술대회(UEGW 2016)에서 발표됐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지난해 10월 신경계가 체내 조직의 기능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전자약 연구개발(Stimulating Activity to Relieve Conditions, SPARC) 프로그램에 2000만달러(약 225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글로벌 제약사 중에선 GSK가 2012년 전자약 개발을 자사의 R&D혁신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는 등 이 분야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구글 계열사인 베릴리라이프사이언스(전 구글라이프사이언스)와 생체전자공학회사 ‘갈바니바이오일렉트로닉스’(Galvani Bioelectronics)를 설립했다. GSK와 베릴리는 전자약 개발에 각사가 소유한 지적재산권과 최대 5억4000만파운드(약 7890억원)를 7년간 투자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