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집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최근 과도한 디지털기기 사용으로 전화번호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디지털치매(digital dementia)’를 호소하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이 질환은 디지털기기의 잦은 사용으로 뇌기능이 손상돼 인지기능을 상실하는 치매의 일종으로 정의된다.
스마트폰 등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스스로 기억하고,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대화 중 필요한 정보가 생겼을 땐 검색에서 찾으면 그만이다. 길이나 지명도 외울 필요 없이 앱으로 확인하면 된다.
이처럼 모든 정보가 뇌가 아닌 디지털기기에 저장되면 뇌의 단기기억 기능이 떨어지고 점차 장기기억과 뇌의 전반적인 기능까지 감퇴해 치매증후군을 초래할 수 있다. 최정석 서울대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최근 ‘대한사회정신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디지털치매를 보이는 인터넷중독 환자를 대상으로 뇌 생체신호와의 연관성을 확인한 결과 청각자극에 대한 뇌 생체신호인 P300 진폭이 알코올·약물 중독 환자와 비슷한 정도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각정보 처리 과정에 문제가 생겼고 주의력과 작업기억력도 저하됐다.
자신이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3~4개 이하이거나, 어제 먹었던 식사메뉴가 생각나지 않거나, 손글씨를 거의 쓰지 않아 메모 습관이 사라졌거나, 애창곡도 가사를 보지 않으면 끝까지 부를 수 없으면 디지털치매를 의심해볼 수 있다.
이런 증상은 당장 심각한 위협을 주는 게 아니여서 병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스트레스를 누적시켜 각종 장애를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치매 발병을 앞당길 수 있다. 최정석 교수는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특히 여러 기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향이 클수록 뇌의 구조적 변화로 선택적 주의력, 오류 탐지 등을 담당하는 인지기능, 감정조절기능 등이 떨어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디지털치매를 개선하려면 전자기기에 대한 의존도부터 줄여야 한다. 스마트폰의 사용을 줄여 여유를 찾자는 ‘디지털 디톡스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1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스마트폰과 컴퓨터 등의 사용을 중지하고 뇌에 휴식을 준다. 하루 30분이라도 야외에 나가 가볍게 달리거나 걸으면 뇌 신경세포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간단한 계산은 되도록 암산으로 하고, 손글씨를 자주 쓰는 습관을 들이면 정보교환을 담당하는 뇌 속 ‘시냅스’가 증가해 치매를 예방하는 데 도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