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권모 씨(30)는 휴일만 되면 집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쟁 같은 일주일이 끝나면 모든 게 귀찮고 정신을 차리기 싫다. 하루종일 누워 있다보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히려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최근엔 평일 업무시간에도 피로감 탓에 꾸벅꾸벅 졸다가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업무효율이 떨어지니 회사가는 게 더욱 싫고 우울감만 깊어진다.
일주일 내내 업무에 시달리다 주말만 되면 깊은 ‘겨울잠’에 빠지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겨울철엔 추운 날씨 탓에 밖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을 청하게 된다. 흔히 ‘잠은 보약’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자도 건강에 해롭다.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은 많이 알려진 반면 과다수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순히 피로가 쌓여 잠이 많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지만 과도한 수면은 뇌졸중, 우울증, 비만 등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적정 수면시간은 개인차가 있어 통상적으로 알려진 7~8시간보다 조금 많이 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9시간 이상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피곤하고 눈만 감아도 잠이 쏟아져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수면과다증(hypersomnias)을 의심해볼 수 있다. 주민경 한림대 성심병원 신경과 교수는 “수면과다증이 심하면 조용하고 어둡거나, 뭔가 집중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바로 잠 들어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며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피로, 불안감 중압감, 체력저하 등을 과다수면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밤에 늦게 자는 잘못된 습관으로 피로가 누적되면 발생률이 높아진다.
취업난, 결혼 문제 등을 겪는 젊은층은 현실도피를 위해 일부러 잠을 청하기도 한다. 서호석 분당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노력해도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무기력감과 좌절감이 느껴질 때 수면중독에 걸릴 수 있다”며 “할 일이 많을수록 잠을 줄여야 하지만 부담감이 한계 수준을 넘어서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잠에 빠진다”고 말했다.
우울한 감정은 과다 수면과 깊게 연관된다. 잠자는 시간이 늘수록 신체활동량은 줄어든다. 이로 인해 신진대사가 감소하면 기분을 북돋우는 역할을 하는 엔도르핀 수치가 감소한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면 정신이 멍한 상태가 지속되는 이유다. 만사가 귀찮고 사교활동에도 무심해져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심하면 우울증으로 악화될 수 있다.
반대로 수면시간이 5시간 이하로 너무 적은 사람에서도 우울증이 잘 발생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우울증과 수면시간의 정확한 상관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우울증 증상으로 잠이 많아지기도 한다. 보통 우울증 환자의 80%는 불면증, 20%는 수면과다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긴 수면시간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부위는 뇌다. 미국 뉴욕대 의대 연구팀이 2004~2013년 29만여명을 대상으로 수면시간과 뇌졸중 간의 연관성을 연구한 결과 하루 8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는 사람은 적정 수면시간인 7~8시간 수면군보다 뇌졸중 위험이 14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7시간 이하 잠을 잔 군은 뇌졸중 위험이 22% 증가하는 데 그쳤다. 뇌졸중에 한해서는 수면과다가 수면부족보다 독약인 셈이다.
주 교수는 “9시간 이상 자는 사람 중 상당수가 두통을 호소한다”며 “잠이 두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통 머리가 욱신거리는 편두통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증상이 1년에 수 차례식, 며칠간 지속되면 ‘클라인레빈증후군(kleine levin syndrome)’이라는 희귀질환으로 분류된다. 주로 10~20세 남자에서 많이 발생하며 평소보다 음식을 몇 배 더 많이 섭취하는 폭식증과 우울증 및 기억장애가 동반된다. 간혹 과잉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예로 영국의 베스 구디어라는 소녀는 2011년 5월 17세 생일에 소파에서 잠깐 낮잠을 잤다가 6개월간 깊은 잠에 빠졌다. 딸이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한 부모는 딸을 병원에 데려갔고 의료진은 베스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 증후군(sleeping beauty syndrome)’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6개월 뒤 베스는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수면과다증은 고쳐지지 않아 5년간 하루의 3분의 2를 잠을 자면서 보냈다.
과다수면증과 같은 질병으로 오인받는 기면증(Narcolepsie)은 잠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수면발작이 나타난다.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힘이 빠지거나, 가위눌림처럼 잠이 들거나, 깰 때 몸에 마비가 오는 증상이나 환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질환은 수면과 각성 상태를 조절하는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다. 이밖에 유전, 두부외상, 시상하부 기능부전,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전 연령대에서 발생하지만 10∼20대 환자가 많다. 국내에선 ‘발작성 수면 및 탈력발작’이라는 병명으로 2009년 5월부터 희귀난치성질환으로 분류됐고 국내 환자는 8만명 정도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