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많이 마실수록 건강에 좋다는 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적당한 수분 섭취는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신진대사를 돕지만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약물처럼 일종의 중독 증상을 초래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저명 국제학술지 ‘영국의학저널(BMJ)’에 실린 ‘요도감염 환자의 물중독’ 사례 보고서에 따르면 한 59세 여성은 요도감염 증상이 나타난 뒤 의사의 권유대로 하루 30분마다 284㎖의 물을 마셨다. 하루 물 섭취량은 5~6ℓ에 달했다. 그러던 중 반복적인 구토, 심각한 언어장애, 불안감 등 증상을 보여로 응급실에 실려왔고 저나트륨혈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09년 정신병동에 입원 중이던 40대 남성 환자가 ‘급성 수분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이 남성의 뇌, 허파, 위, 간, 창자 등이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물중독증(water Intoxication)은 물을 과도하게 많이 섭취해 체내 전해질 농도의 균형이 깨져 무기력, 두통, 구역, 경련 등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다. 의학적으로는 저나트륨혈증이라고 한다. 류동열 이대목동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체내 수분이 많아지면 혈액이 묽어지고 나트륨 농도가 떨어진다”며 “이럴 경우 세포 안팎의 농도 차이로 세포 밖의 과다 수분이 세포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세포가 붓게 된다”고 설명했다.
저나트륨혈증이 심해지면 간경변증, 울혈성 심부전 등이 초래되고 심하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다. 성인의 신장은 1분에 16㎖ 정도의 물을 처리할 수 있지만 갈증 탓에 급하게 많은 양을 마시면 혈액 내 나트륨 농도가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혈액의 정상 나트륨(염분) 농도는 혈액 1ℓ당 140m㏖(밀리몰) 정도로, 135m㏖보다 낮아지면 물중독으로 진단한다.
물을 많이 마시면 뇌는 방어적인 작용으로 연하(삼키기)억제 작용을 활성화한다. 연하억제는 구강·인두·식도를 통한 음식물의 소화작용이 저해돼 음식물을 씹거나 삼키기가 어렵고 불편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에도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연하 메커니즘이 무너지면서 수분중독 상태가 된다.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부위는 뇌다. 뇌세포가 부으면 뇌압이 상승하며, 혈액의 나트륨 농도가 100m㏖ 이하까지 떨어지면 중추신경계가 손상돼 혼수 상태에 빠지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중증 저나트륨혈증에 따른 사망률은 30%에 육박한다.
물중독은 저체중인 사람,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장시간 작업을 하는 사람, 호르몬 이상으로 소변량이 많아지는 요붕증 환자 등에서 발생률이 높다. 잦은 스트레스로 신장의 배설능력이 떨어진 사람도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물중독 증세를 ‘심인성 다음증(多飮症)’이라는 정신질환의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한양대 의대가 발표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저나트륨혈증’에 대한 논문에 따르면 만성 정신질환자의 6~17%가 물 중독 증세에 시달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남성은 하루 1.5ℓ, 여성은 1ℓ의 수분을 마셔야 한다. 이는 일반 생수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여타 음식과 음료를 모두 포함한 것이어서 의무적으로 물을 6~8잔씩 마실 필요는 없다. 하루 세 끼만 챙겨 먹어도 하루 수분 섭취량의 20%를 충족시킬 수 있다. 수분 함량이 높은 채소, 과일 위주의 식단이라면 더 많은 수분 섭취가 가능하다. 사과는 84%, 바나나는 74%, 브로콜리는 91%가 수분으로 구성됐다. 수분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베이글도 수분이 33%나 들어있을 정도로 음식의 상당 부분은 물로 이뤄져 있다.
이 교수는 “의사는 환자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물을 충분히 마시라고 조언하는데, 환자는 이 말을 대부분 되도록 많이 마시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며 “충분하다는 것은 많이가 아닌 적당히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한꺼번에 많은 물을 마시기보다는 조금씩 여러번 나눠 마시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심부전 환자는 물을 많이 마시면 기존 증상이 악화될 수 있어 하루 1ℓ 이내로만 마셔야 한다. 신부전증이나 간경화 환자도 심부전 환자와 비슷한 양의 물만 섭취하는 게 바람직하다. 중증 갑상선기능저하증 환자의 경우 물을 많이 마시면 수분 배출이 잘 되지 않아 저나트륨혈증의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반대로 전립선염·요로감염·방광염 등 염증성 비뇨기질환 환자는 물을 자주 마셔 염증유발물질을 소변으로 배출해야 한다. 수분이 부족해 노폐물이 배출되지 못하고 농축되면 요로결석으로 변할 수 있다. 폐렴·기관지염 같은 호흡기질환 환자는 열이 오르고 호흡이 가빠져 피부와 호흡기를 통한 수분 배출이 늘어나므로 물을 자주 마시는 게 좋다.
고혈압·협심증 환자는 혈액 속 수분이 부족할 경우 혈액 점도가 높아져 혈액 흐름에 문제가 생긴다. 혈전이나 지방이 혈관벽에 달라붙는 것을 막으려면 하루에 최소 2ℓ의 물을 마시는 게 좋다. 신부전증 합병증이 없는 당뇨병 환자가 물을 자주 마시면 혈당이 올라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