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감기·중이염 치료에 남용, 일부 환자 감기약으로 오해 … 피부발진·비만·근육관절손상 등 유발
전세계에서 매년 70만명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로 목숨을 잃는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항생제 내성균에 매년 200만명이 감염되고 2만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다. 영국 전문가들도 오는 2050년이 되면 항생제 내성으로 매년 1000만명이 사망하고, 세계 경제는 100조달러 규모의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항생제 사용률이 높아 부작용이나 내성 발생에 취약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 2014년 기준 국내 항생제 사용량은 30.1DDD( Defined Daily Dose, 의약품 규정 1일 사용량, 하루 동안 1000명 중 해당 약제를 복용하는 사람 수)로 OECD 평균인 21.1DDD보다 높다.
항생제는 몸의 나쁜 세균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심한 상처, 화상, 화농성 염증, 호흡기감염증, 수술 후 감염 등을 완화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나쁜 세균은 물론 정상 세균까지 피해를 입혀 설사, 구토, 피부발진, 소화기장애, 신장장애, 간장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잦은 사용으로 내성이 생기면 신종 감염병에 극도로 취약해진다.
어린이는 성인보다 항생제 남용에 따른 부작용에 쉽게 노출된다. 감기와 중이염은 어린이에 대한 항생제 처방이 가장 많은 질병이다. 감기의 80~90%는 바이러스 감염증이어서 세균을 제거하는 항생제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소아 환자의 부모들이 무턱대고 의사에게 항생제를 처방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관계자는 “계속 열이 나는데 왜 해열제만 주고 항생제는 처방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거나, 항생제를 감기치료약과 같은 것으로 여겨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환자도 있다”고 말했다.
감기 같은 급성 상기도감염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은 2002년 73.3%에서 2015년 44%로 감소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호주(32.4%), 대만(39%), 네덜란드(14%) 등보다 높은 수준이다. 소아 외래 환자에 대한 항생제 처방은 아직도 75%대를 유지하고 있다.
감기 치료에 항생제가 필요한 경우는 일부 세균성 감염증에 한정된다. 세균성 인두(입안과 식도 사이)염은 가을과 겨울에 5~12살 어린이에서 주로 발생하며 38.5도 이상의 열이 3일 이상 계속되고 식욕부진과 호흡이 빨리진다. 여기에 목이 아프고 속이 메슥거리는 소화기 증상이 동반된다. 일반적인 감기인 바이러스성 감염증보다 고열 증상과 무력감이 심한 편이다.
이밖에 항생제가 필요한 감염증은 백일해, 마이코플라즈마, 클라미디아 등이다. 백일해는 보통 열이 없고 낮에 기침이 없으나 밤이 되면 발작적 기침과 구토가 동반된다. 마이코플라즈마와 클라미디아 감염은 기침이 심한 게 특징이다. 폐렴이 원인이 돼 나오는 기침도 항생제가 필요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08년부터 만 2세 미만 영유아에게 항생제 성분이 포함된 감기약 사용을 금지했다. 영국도 2009년 6세 미만 어린이에게 감기약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유럽이나 일본 등도 항생제를 제한적으로 처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항생제 오남용에 대한 대책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2014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약국에 판매하는 어린이 감기약 주의사항에 ‘만 2세 미만에게 투여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도록 조치한 게 전부다.
중이염도 항생제 오남용을 유발하는 주원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5년 유소아 급성 중이염 항생제 적정성 평가’에 따르면 유소아 급성 중이염에 대한 항생제 처방 비율은 84.2%로 집계됐다. 네덜란드나 덴마크 등 유럽 지역의 40~70%보다 꽤 높은 편이다. 현재 미국이비인후과 두경부외과학회는 귀에 물이 차는 삼출성 중이염에는 항생제, 항히스타민제, 비충혈제거제, 비강스테로이드제 등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감기 뒤에 발병하는 급성중이염도 환자의 80% 가량은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히 낫는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된다.
어린이에게 가장 흔한 항생제 부작용은 페니실린에 의한 피부발진 등 알레르기 반응이다. 또 항생제 복용 중 설사, 멀미 증상, 위장장애, 심하지 않은 피부발진이 나타나면 의사나 약사에게 알려야 한다. 항생제 중 ‘테트라사이클린(tetracycline)’은 뼈와 치아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고, ‘퀴놀론(Quinolones)계 항생제’는 발작을 일으키거나, 콜라겐 합성 저해로 인한 관절손상 및 근무력증을 야기할 수 있어 어린이에게 적합하지 않다.
아목사실린(Amoxicillin)과 테트라사이클린은 소아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14년 미국 필라델피아소아병원의 연구결과 2세 이전 최소 4회 이상 항생제에 노출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비만이 될 위험이 11%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항생제가 세균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만 방지에 필수 요소인 장내 유익균까지 제거된다. 이럴 경우 비만을 촉진시키는 유해균이 득세하면서 지방이 축적되기 쉽다.
실제로 항생제는 축산에서 가축의 살을 찌우기 위해서도 자주 쓰인다. FDA 조사 결과 2009~2013년 돼지, 닭, 소, 해산물 양식에 들어가는 항생제의 매출은 20% 증가했으며 총 사용량은 1만5000t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생제 오남용으로 인한 가장 큰 문제는 내성이다. 항생제에 듣지 않는 다제내성균, 이른바 수퍼박테리아 감염 건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박병주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항생제 내성은 세균 등이 항생제에 저항하는 능력이 생겨 더이상 치료가 어려워진 상태로 치료법이 없는 신종 감염병과 파급력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사람의 장내에 서식하는 장알균(장내구균)에 대한 항생제 ‘반코마이신’의 내성률(항생제 투여시 살아남는 세균의 백분율)은 36.5%로 영국(21.3%), 독일(9.1%), 프랑스(0.5%)보다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국내에서 2명의 다제내성균 환자가 처음 발견된 이래 의료기관에서 신고된 다제내성균 발생건수는 2013년 8만955건에서 2014년 8만3330건, 2015년 8만8249건으로 3년새 9% 증가했다. 현재 보건당국은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알균(VRSA),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알균(MRSA), 반코마이신 내성 장알균(VRE), 다제내성 녹농균(MRPA),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균(MRAB), 카르바페넴 내성 장내세균(CRE) 등 6종의 항생제 내성균을 법정감염병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항생제 부작용을 예방하려면 가벼운 감기처럼 항생제 없이 치료할 수 있는 병에는 가급적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박병주 교수는 “병원 진료시 의사에게 항생제를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면 빼 달라고 요청하는 게 좋다”며 “항생제를 먹다가 자의적으로 중단하면 완벽히 박멸되지 않은 세균이 내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복용량과 복용 시기를 정확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항생제 남용도 문제지만 면역력이 약한 환자나 노인의 경우 폐혈증과 같은 질환으로 번지기 전에 항생제를 빨리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항생제 사용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 없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