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주축이 돼 시행 중인 만성질환관리시범사업이 의료계 내부의 강력한 반대여론에 부딪히며 난항을 겪고 있다. 이 사업이 원격의료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의료계 전체의 민심도 얻지 못한채 복지부와 의협이 무리하게 사업을 강행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일부 지역의사회를 중심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만성질환관리제도, 이른바 ‘만관제’는 동네의원이 스마트폰과 전화를 통해 고혈압 및 당뇨병 재진 환자를 관찰한 뒤 최종적으로 대면진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네의원 의사가 적극적으로 만성질환자를 관리함으로써 환자의 건강 상태와 자기관리 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로 도입이 논의됐다.
전화상담 허용에 반대해오던 의협은 복지부로부터 “전화상담은 대면진료의 보조로 활용될 뿐 결코 원격의료 도입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는 약속을 받고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보건복지부와 의협은 이달 초 의원급 의료기관 1870곳을 시범사업 기관으로 선정했다. 시범사업 참여 의원은 환자별 관리계획을 세우고 환자가 스마트폰 앱을 통해 전송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 1회 이상 혈압·혈당 수치를 관찰하고 매달 2회 이내로 전화상담을 실시한다. 만성질환관리 수가는 통상적인 서비스(월 1회 대면 점검·평가, 주 1회 스마트폰앱 관찰·관리, 월 1회 전화상담 기준)를 제공한 경우 환자당 월평균 2만7300원을 받을 수 있다.
환자가 매주 의사에게 ‘M 건강보험’ 모바일앱이나 인터넷사이트 건강iN 웹페이지(hi.nhis.or.kr)를 통해 혈압·혈당 수치를 전송하면 문자메시지 등으로 월 2회 이상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복지부는 자가혈압계 및 혈당계를 보유한 환자부터 시범사업에 참여시킬 계획이다. 심각한 내과질환이나 합병증이 동반된 환자는 참여 등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의료계 내부에서는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이 본격적인 원격의료 도입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전국의사총연합 관계자는 “전화냐 화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직접 대면이 아닌 원격으로 정보통신기술(ICT)를 활용해 환자의 생체정보를 해석하고 필요한 조치와 상담 등 처방을 시행한다는 점에서 이 사업은 낮은 급의 의사·환자간 원격의료로 볼 수 있다”며 “이번 사업이 원격의료로 변질되면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져 수많은 개원의들이 폐업하게 되고 젊은 의사들의 신규 진입도 극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상남도의사회 관계자도 “지속적 관찰과 상담을 위해 전화상담 등 비대면 관리를 공식화하면서 ‘대면진료 원칙을 훼손하지 않고 원격의료는 배제한다’는 의협과 복지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충분한 논의 없이 시범사업을 주도해 여론의 뭇매를 맞던 복지부와 의협은 이번 국감에서 나온 정진엽 복지부 장관의 발언 탓에 다시 한번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였다. 정 장관은 지난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복지부 국감에서 ‘전화상담을 포함한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이 사실상 원격의료가 아니냐’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은 큰 틀에서 원격의료라고 볼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동안 복지부와 의협은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을 두고 원격의료와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 장관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을 한 셈이다. 복지부가 청와대나 경제부처의 이목을 의식하면서 보여주기식으로 전화상담을 원격의료의 출발점으로 추진하려 했던 속내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 장관은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추가 질의시간에 “원격의료는 원격으로 진단과 처방을 하는 것인데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은 전화상담을 주로 하고 검사를 모니터링하는 것”이라며 “원격의료보다는 상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고 기존 발언을 정정했지만 의료계 안팎으로 시범사업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지부와 손을 잡았던 의협도 정 장관의 발언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범사업 참여기관 중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만성질환 관리와는 거리가 먼 성형외과(1곳)와 산부인과(4곳)이 포함되면서 실제 질병관리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의협 관계자는 “이들 성형외과와 산부인과는 표방하는 진료과목과 달리 실제 일반과로 운영되고 있다”며 “만일 만성질환 환자 관리를 엉터리로 했다면 평가 결과에서 드러나게 되며, 진료과목이 시범사업 참여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고령인 만성질환 환자가 스마트폰 앱 등을 제대로 활용하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개원의는 “진료하는 만성질환 환자은 거의 60대 이상인데 스마트폰이나 다른 의료기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시범사업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의료진은 물론 환자에 대한 체계적인 홍보 및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