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는 색이 짙고 선명하고, 특유의 향을 머금으며, 알 사이가 촘촘한 게 좋다.
8일은 24절기 중 15번째 절기로 흰 이슬을 뜻하는 ‘백로(白露)’다.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 수증기가 엉켜 풀잎에 이슬이 맺혀 이름이 지어졌다. 백로에서 추석까지는 포도가 많이 나 ‘포도순절(葡萄旬節)’로도 불린다.
포도(葡萄)는 포도과 낙엽 활엽 덩굴성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다.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남부에서 터키에 이르는 지대라는 게 통설이다. 고대 이집트 왕조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포도를 재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기원전 16~15세기경 이집트를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서 포도가 키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포도는 중동 지역을 거쳐 유럽에 전파됐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으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고려시대 ‘고려사’에는 충렬왕 11년(1285년) 원(元)의 황제가 고려 왕에게 포도주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안축(安軸)의 시문집 ‘근재집(謹齋集)’에는 포도주를 선물 받고 읊은 시가 나오는 것으로 볼때 고려시대에 이미 한국에는 포도주가 존재했다.
조선시대에는 1613년 ‘지봉유설(芝峯類說)’에 포도주가 등장한다. 1715년경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종포도(種葡萄)라는 포도 재배법이 나온다. 1766년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재배법 외에 저장법, 포도주 제조법 등이 나온다. 하지만 포도의 재배나 가공이 널리 보급되거나 상업적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국내 재배는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포도는 생산량과 수확량이 많지만 금방 상하고 물러 오랜시간 보존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포도주, 건포도 등 가공제품이 크게 발달했다. 냉장과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포도는 사치품이었다. 로마 황제나 귀족을 묘사한 그림에는 포도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포도는 전세계 과실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3개국이 약 40%를 생산한다.
포도의 품종은 7000여 종에 이른다. 재배되는 것은 약 1000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게 유럽종, 미국종, 교배종 등으로 나뉜다. 유럽종은 품질이 우수하고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지만 추위와 병충해에 약하다. 톰슨시들레스, 네오머스캣, 블랙함부르크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종은 전파 과정에 따라 남유럽계, 중앙아시아계, 동아시아계로 분화했다.
미국종은 라브루스카, 델라웨어, 로툰디폴리아 등으로 추위와 병충해에 강하다. 스칼렛 로얄(Scarlet Royal)은 씨 없는 포도로 과일전문 고급마트에서만 판매된다. 적포도 중 가장 비싸며 자줏빛을 띈다. 껍질이 얇고 과육이 부드러우며 과즙이 많고 당도가 높다. 풍부한 햇살과 쾌적한 기온의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재배한다. 매년 11월까지 수확한다.
국내에서는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미국종과 교배종을 많이 심는다. 대표적으로 거봉이 유명하다. 송이가 크고 씨가 적으며 단맛도 풍부하다.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캠벌리로 자줏빛을 띤 검정색으로 알이 중간 크기이며 8월 중순부터 하순에 걸쳐 익는다. 1892년 미국에서 캠벌리가 수입됐다. 최근 하우스재배 도입으로 출하기간이 6월 말에서 9월 말까지로 확대됐다. 하지만 새콤달콤한 캠벌리 포도의 참맛을 즐기려면 8월에 출하한 게 가장 좋다.
국내에서 키우는 품종은 대부분 양조용이 아니다. 경북 김천, 충북 영동, 경기도 화성 등이 주산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올해 포도 생산량을 지난해보다 약 1% 증가한 27만t 수준으로 전망했다. 작황은 좋으나 6월 가뭄의 영향으로 포도알 크기는 다소 작다.
양조용 포도는 적포도주용과 백포도주용으로 나뉜다. 카베르네소비뇽, 피노누아, 시라, 가메, 메를로, 산지오베제, 템프라니요 등이 적포도주용이다. 백포도주는 리즐링, 소비뇽 블랑, 슈넹 블랑, 샤르도네 등으로 만든다. 매년 접붙이기와 꺾꽂이 등으로 유전자 변화가 거의 없어 병충해에 매우 약하다.
포도는 비타민과 유기산이 풍부하다. 성숙함에 따라 당분이 증가하고 산이 감소한다. 완숙하면 당분이 최대치를 기록한다. 일반적으로 당분은 14~15%다. 향미성분으로는 주석산과 사과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포도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많은 과일 중 하나다. 포도주, 샴페인, 코냑 등 양조용으로 생산량의 80%가 사용된다. 식용은 20%에 불과하다. 세계 과일 생산량의 3분의 1이란 게 실감나는 대목이다.
포도는 무더운 여름에 지친 몸을 활력 넘치게 충전시키는 대표적인 보양 과일이다. 주성분인 포도당은 피로해소에 탁월하며 펙틴·타닌 성분은 원활한 장운동과 해독작용을 도와준다. 알칼리성식품으로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당지수가 50으로 높은 편에 속해 당뇨병 환자나 비만인 사람은 과도한 섭취를 피해야 한다.
신선한 포도 표면에는 하얀색 가루가 묻어 있다. 이는 농약이 아니라 과분(果粉, Bloom)이다. 이 성분은 물에 녹지 않는다. 구성 성분의 약 80%가 항산화작용, 항균작용을 하는 올레아놀린산(OIleanolicacid)이다. 과분은 포도의 신선도가 유지되도록 도와줘 먹기 직전까지는 씻지 않는 게 좋다.
포도의 껍질 속 레스베라트롤은 장수유전자 시르투인(Sirtuin)를 활성화시켜 세포의 사멸을 방지하고 수명 연장에 도움을 준다. 조엘 그린버거(Joel Greenberger) 미국 피츠버그대 교수는 레스베라트롤이 방사선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레스베라트롤은 델라웨어 등 짙은 보라색의 포도에 풍부하다.
김달래 한의원 원장(전 경희대 한의대 교수)은 “레스베라트롤은 혈액에 혈전이 생기는 것을 막아줘 심장병, 동맥경화 등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며 “유해물질의 독성을 완화시켜 유전자 변형을 막고 비정상 세포의 증식을 억제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포화지방산이 많은 동물성 지방 섭취량이 많다. 하지만 동맥경화나 심장병에 걸리는 일이 적어 학자들은 이를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라 부른다. 각종 연구를 통해 프랑스인이 즐겨먹는 적포도주에는 폴리페놀이 여성호르몬과 작용, 혈관 내에서 일산화질소를 발생시켜 동맥경화를 방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인은 프랑스인보다 상대적으로 알코올 대사 능력이 약해 과음은 피해야 한다.
개에게 포도를 주면 치명적이다. 식욕부진, 설사, 구토, 기면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면 급성 신부전증으로 죽을 수 있다. 포도를 고를 때에는 색이 짙고 선명하며 특유의 포도향을 짙게 머금은 것을 골라야 한다. 알과 알 사이에 공간 없이 밀집돼 있는 게 좋은 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