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해왔다. 흔히 ‘이기적인 본성=성악설’, ‘이타적인 본성=성선설’로 알고 있지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누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최근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면서 이타심 또는 이기심을 나타나는 데 두뇌와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보고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18세기 들어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이런 주장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화를 거듭해왔고 여기엔 ‘이기심 유전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적자생존의 법칙은 경제 분야에도 적용돼 초기 자본주의 이론의 근간이 됐다. 최근에서야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와 협업이 자본주의 및 경제 발전, 인류 성장에 도움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는 추세다.
흥미로운 점은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신체장기를 기증하는 등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강한 이타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과 뇌 형태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조지타운대 연구팀은 장기기증 경험이 있는 실험참가자 19명과 해당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실험참가자 20명을 대상으로 분노나 공포를 느끼거나 무표정한 사람의 이미지를 관찰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실험참가자들의 뇌가 어떻게 변하고 차이가 나타나는지 비교·분석했다.
연구 결과 장기기증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감정 및 학습 등을 담당하는 우뇌의 편도체(amygdala)가 더 활성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공포에 질린 사람의 이미지를 볼 때 유독 큰 감정 변화가 관찰됐다.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반사회적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환자의 뇌는 보통 사람에 비해 공포심이나 동정심 등에서 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과거의 연구결과와 뚜렷이 대비된다.
아비가일 마쉬 조지타운대 교수는 “이타적인 사람의 뇌는 구조적·기능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도록 특화돼 있다”며 “즉 이타성이 강한 사람과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뇌는 모든 부분에서 반대”라고 설명했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 본능적으로 기쁨을 느끼면서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기도 한다. 미국 국립보건원이 많은 돈을 기부할 때와 가만히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두는 상황을 설정한 뒤 뇌의 움직임을 살펴본 결과 기부를 결심하는 순간 쾌감에 반응하는 뇌의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됐다.
인류에게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협동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예일대 연구팀에 따르면 생후 1년 미만의 신생아를 상대로 동그라미를 도와주는 세모, 동그라미를 밀쳐내는 네모의 영상을 보여준 뒤 세모와 네모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하자 87.5%가 세모를 골랐다. 아기들도 남을 돕는 존재와 방해하는 존재를 자연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은 같은 행동을 할 때 활용하는 뇌 부위도 다르다. 설선혜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때와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을 할 때 사용하는 뇌 영역이 구분된 반면 이타적인 사람은 같은 영역을 사용한다”며 “다른 사람을 도우려면 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처럼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학습하거나 행동할 땐 미간의 바로 안쪽 부분에 있는 ‘복내측 전전두피질’,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할 땐 미간에서 이마 위쪽에 위치한 ‘배내측 전전두피질’의 활동이 증가한다.
이런 상태에서 이타적인 성향의 사람은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을 할 때 모두 복내측 전전두피질의 활성이 증가한다. 반면 이기적인 성향인 사람은 자신을 위해 행동할 땐 복내측 전전두피질, 다른 사람을 위할 땐 배내측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직관적·자동적인 선택의 가치를 계산하는 부위, 배내측 전전두피질은 분석적인 가치판단을 하는 부위다. 김학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같은 신경학적 차이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지 혹은 경험으로 결정되는지,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면 어느 시기에 어떤 요인의 영향을 받는지 등에 대한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정 유전자가 이타적 행동을 하게 유도하기도 한다. 최근 연구결과 ‘AVPR1a’라는 유전자가 일부 변이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체로 돈을 잘 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유전자는 아르기닌-바소프레신(arginine vasopressin, AVP)이라는 호르몬이 뇌세포에 작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소프레신 호르몬은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 작용한다.
감정적인 교감이 이타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정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가깝다고 느끼면 여성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증가하면서 나를 희생하더라도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이타심이 들게 만든다.
프로게스테론은 여성의 월경 주기에 따라 그 수치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성 호르몬이다. 여성호르몬이라고 여자에게만 있지는 않고, 남자에게도 수치는 낮지만 존재한다. 여성은 폐경기가 지나면 이 호르몬 수치가 떨어진다. 선행 연구결과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높을수록 다른 사람과 사귀려는 욕구가 강해진다고 밝혀졌다.
스테파니 브라운 미국 미시건대 교수는 “친해지면 돕고 싶은 호르몬이 생기고 동시에 감정적으로 스트레스가 줄면서 편안하게 느껴진다”며 “이타심의 이런 작용은 사회적 친밀도가 높은 사람이 왜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병에 잘 걸리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