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정확한 진단 바탕 아래 발전해나가야
IPL·레이저침은 한의학적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 있어 “필요에 따라 활용하겠다”
“진료 과정에서 환자의 예후를 정확히 파악하고, 한의학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려면 의료인인 한의사도 과학적 진단장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해야 합니다.” 김필건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정부의 규제 기요틴에 대한 입장’ 기자회견에서 복지부가 허용 범위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에 대해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의료기기에 제한을 두는 것은 결국 규제 개선이 아닌 ‘개악’일 뿐”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풀어야 할 ‘규제 기요틴’ 중 하나로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꼽았다. 정부가 이를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국민의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에서다.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병원을 늘려 시장을 키우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의료기기 범위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오는 6월까지 어떤 의료기기를 허용할 지 세부 의료기기 목록 및 관련 기준을 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등 첨단 의료기기는 검토 대상에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의사 단체들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조치”라며 반발하고, 한의사 단체는 “국민의 10명 중 9명이 원하는 정책”이라며 반박했다. 이후 서로를 비난하는 ‘전쟁’이 시작됐다.
김필건 회장은 “복지부가 문제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며 “복지부가 사용할 수 있거나 없는 의료기기를 결정한다면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으로, 환자 진단을 위한 의료기기에 대해선 모든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호 대한한의사협회 기획이사도 “특정 의료기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허용할 게 아니라 규제를 개혁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며 “한의사들의 의료기기 사용이 규제 개혁 대상이 돼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2013년 12월 26일 헌법재판소는 한의사가 안압측정기 같은 의료기기를 사용해 진료행위를 한 것이 의료법 위반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헌재는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등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이들 장비는 측정 결과가 자동으로 추출된다”며 “신체에 아무런 위해를 발생시키지 않는데다 측정 결과를 한의사가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후 복지부는 이를 근거로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착수한 것이다.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활용하는 게 허용되면 전문성이 요구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필요한 교육과정을 준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회장은 “CT나 MRI가 도입되던 초기엔 양의사들도 이에 대해 교육받고 기기를 쓴 게 아니냐”며 “첨단 진단기기는 현대물리학과 과학 발전의 산물로, 한의학도 ‘정확한 진단’에 초점을 맞추려면 활용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항변했다.
이어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의사들은 왕진가방을 들고 택시를 타고, 한의사는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야 하는 것이냐”며 “한의사와 의사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같이 사용하도록 돼 있는 것처럼 진단을 위한 병명을 같이 사용하면서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발을 묶어 놓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김태호 기획이사도 “의협 정책연구소에서 나온 연구만 봐도 의학과 한의학 교과과정이 75% 정도 일치하고 있다”며 “의대 6년 졸업한 의사들도 초음파 사용 수련은 받지 않는다. 같은 수준으로 교육받은 의사들은 의료기기 사용에 제한이 없고, 한의사들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한의사들이 가장 허용되길 원하는 기기는 X-레이다. 한의원 진료 특성상 무릎이나 발목 부위 등의 골절 환자가 많아서다. 예컨대 손목이나 허리가 접질렀다며 찾아온 염좌 환자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다가도 혹시나 ‘골절이 아닐까’ 걱정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일반 의원에서 X-레이를 촬영한 뒤 다시 한의원을 방문해야 한다. 한의협은 “한의학적 골절과 의학적 골절은 다르지 않고, 단지 이를 어떻게 해석해서 진단내리고 치료하는지의 여부가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의협은 수년 전부터 “한의대에 ‘영상의학 과목을 개설하겠다”며 “기존 한의사들은 1년간 하루 1~2시간 배우면 충분하다”고 주장해왔다. 박완수 대한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의료계에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서만 CT나 MRI를 사용할 수 있고 일반의들은 못 쓰게 법으로 제한돼 있거나 규정돼 있지 않듯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활용하는 것을 이같은 개념에서 생각해주길 바란다”며 “한의학에도 전문의 체제가 있고 그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고 밝혔다.
한의협은 ‘한의학적 진단에 필요하므로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면서 필요에 따라 치료용 의료기기도 사용하겠다고 언급했다. 김 회장은 “치료에 쓰이는 IPL 기기나 레이저침 등은 한의학적 원리가 담겨 있어 한의학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의협은 “외국에서는 이미 한의사를 통합의학의 전문가로 인정하는 곳도 있다”며 “최근 복지부가 지원하고 한의협이 주도한 한의학 세계화 사업의 성과로 한의협은 러시아가 한국 한의사 학위를 자국 의사 학위와 동일하게 인정키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규제 기요틴으로 한의사의 의료행위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며, 확대되는 세계 전통의약 시장에 한의학이 우뚝 설 수 있는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무엇보다도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에 대해 반발하는 의료계를 향해 ‘이런 게 갑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판했다. 김 회장은 “의료인인 한의사가 한방 의료행위를 국민 건강을 위해 발전시켜 나가겠다는데 의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복지부는 이같은 비상식적인 횡포에 신경써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자신들만이 유일한 의료인집단이라고 착각하며 한의학의 폄훼에 몰두하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에 경고한다”며 “국민 건강을 볼모로 붙잡지 말고 국민보건향상을 위해 합리적인 의료 환경 건설에 함께 나서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박 수석부회장은 “일각에서 한의사들이 의료기기를 사용하면 건강보험 재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의원이나 병원에 가지 않고 한의원에서 한꺼번에 치료받을 수 있어 추가적인 건강보험 재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의협의 이같은 주장은 ‘상호주의’를 배제한 일방적 논리라는 지적이다. 현대적 진단 의료기기를 기존 병의원에서만 사용케 함으로써 환자가 병원을 이중으로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의사가 X-레이를 판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정작 ‘판독에 자신 없다’고 고백하는 의사가 적잖은 실정이다. 의대에서는 영상의학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지만 1년 정도 배우는 수준이다. 진단의료 장비의 영상검사 판독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4년간 기초의학 교육과 4년간의 추가 영상의학 교육이 필요하다. 검사 결과를 잘못 판독하면 엉뚱한 치료법이 적용돼 결국 환자가 피해를 입기 쉽다. X-레이의 좌우 구분을 잘못해 의사가 환자의 멀쩡한 부위를 잘라내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기도 한다.
한의협의 주장에 맞서 대한의사협회도 같은 날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에 반대하는 보도자료를 내고 “정부의 규제 기요틴으로 인해 국민건강이 위협당하고 있다”며 이를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