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월호 침몰 사건을 접하고 배이름부터 마음에 거북했다. 일종의 대형유람선이니깐 ‘흐르는 세월, 안타까워하지 말고 한없이 놀아보자’는 뜻에서 세월호라 지었나 싶었다. 마치 ‘노새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같은 민요가락이 연상됐다.
한데 일련의 신문기사를 보고나니 ‘세월이 흐른다’의 세월(歲月)이 아니라 세상 세(世)와 넘을 월(越)을 합한 ‘세상을 초월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번 사건의 원초적 주범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회장이 이끄는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의 교리가 투사된 것이었다. 세월은 현세보다 내세를 기대하는 교인들에게 더 많은 헌금을 걷기 위한 구호였나. 안전운항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현실을 뛰어넘어도 된다는 탐욕이었나. 그 죄악같은 ‘世越’이 결국 핏덩이 고교생들의 ‘歲月’을 수장시키고야 말았다.
진도, 조도, 안산은 내게 이런 인연이 있다. 진도는 2007년 여름 기자가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왔다. 몽고군과 싸우기 위해 쌓은 용장산성과 야트막한 진도읍성을 들렀다. 읍성 속 텃밭에서는 몇몇 할머니들이 채소밭과 콩팥을 메는 모습이 평안했다. 운림산방의 아름다운 백일홍과 작은 연못, 인근 첨찰산 쌍계사 상록수림도 아련하다. 이제 해마다 백일홍이 피는 계절이면 아버지 산소와 운림산방의 배롱나무를 매치시키며 그 붉은 단심이 영원하길 기도하곤 한다.
팽목항에서 가까운 곳의 세방낙조는 우리나라서 손꼽히는 절경낙조로 꼽힌다.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고 진도읍내로 들어갔지만 그 절세의 예쁜 낙조도 세월호 유가족의 눈엔 핏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울돌목 옆 진도대교 전망대에 올라갔을 때에는 때마침 조류가 바뀌는 시간인지 어질어질할 정도로 조류가 마구 뒤엉켜 무서웠다.
거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추격해오는 왜선을 유인해 수장시킨 명량대첩이 탄생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명량해전에서 500m나 되는 진도해협을 쇠사슬로 걸어놨다가 왜선이 추격해오자 해협 양쪽에서 잡아당겨 침몰시켰다는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고 한다. 순전히 조수간만의 시간차와 조류속도, 왜선의 진격속도를 이용해 올린 전과라는 설명이다.
지금의 기술로도 단기간에 500m나 되는 쇠사슬을 제조한 다음, 육중한 사슬을 운반해 양측 해변에 걸어당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목선이라도 배가 엄청난 최고속도로 쫓아오면 쇠사슬이 끊어지고 말아 기껏해야 한두척만 부서졌을 것이란 가설이다.
그런데 울몰목과 그리 멀지 않은 맹골수도에서 좌초된 것은 왜선이 아니고 선량한 우리시민을 태운 현대적 철갑선이다. 비리와 부실(일명 해피아)이 담합하고, 해운종사자들이 안전불감증에 빠져버렸으니 철갑선이면 무엇하랴. 과거 출입했던 몇몇 해양수산부의 아는 당국자 대부분이 퇴직후 해운조합, 해운회사, 한국선급 등의 임원으로 옮겨갔으니 그 때 알아볼 일이었다. 추억해야 할 수학여행 여객선이 비극이 돼 돌아왔다.
조선강국이라더니 대형 상선은 잘 만드는데, 대형여객선은 기술이 없어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만들지 않는단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덫에 걸려 3만달러, 4만달러 달성 못한다고 안달복달 하더니 제 식구 안위를 내팽개친 못난이가 됐다. ‘돈돈’하면서 돈 아끼려고 위험한 일제 중고선을 사들일 게 아니었다. 국산기술로 만든 안전한 신형 여객선을 띄워야 했다. 영세해운사 망하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낭비되는 연간 200억원 절감한답시고, 여객선 선령을 25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할 게 아니었다.
조도는 가보지 않았지만 1990년초 군 복무시절 펜팔을 통해 조도 출신 여공을 덕수궁 옆 다방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루에 8시간 이상 컴퓨터조립을 하고 토·일요일에도 하루는 꼬박 근무한다는 그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뭍으로 나왔다며 섬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명절 때에도 고향엔 가진 않는다고 했다. 편지를 통해서는 따스함이 뭍어났지만 막상 만나보니 삶에 지친 듯한 표정과 말투, 왜소한 체구에 나는 더 이상 만나진 않았다.
그러면서 가끔 지도를 볼 때 지금은 뭍이 된 진도에서도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외딴 섬에서 그 옛날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섬에 새가 많이 날아다녀 조도(鳥島)인가 했더니 다도해의 여러섬이 새의 군무하는 새처럼 놓여져 평온한 풍경이라하며 조도로 지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타자의 눈에는 시적인 조도의 이미지일지라도, 당사자에겐 험난한 삶의 터전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산은 1970년대말과 1980년대말에 각각 반월공단, 시화공단이 들어서면서 경향 각지에서 고향을 뿌리치고 공장과 회사에 취직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의 터다. 이런 안산의 퇴화돼버린 섬, 지금은 하나의 둑이 돼버린 오이도는 서민들의 잃어버린 고적하고 황량한 삶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많은 시에서 인용돼왔다.
단원구, 단원고의 단원은 조선시대 대표적 풍속도 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가 결혼 후 안산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표암(豹菴) 강세황을 사사해 그림을 배운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단원이 해학적, 풍자적인 그림으로 서민에게 위안을 주었으니 안산과 부합하는 바가 있다.
군대 시절 외박나온 뒤 갈곳이 마땅잖아 막연히 오이도까지 갔다가 국밥 하나 사먹고 귀대한 기억이 난다. 제대후 5개월간 양주의 골판지박스 공장에 취직, 안산·시화로 돌아다니면서 박스를 배송하던 생각이 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고단한 삶들을 많이 지켜 본 시절이다. 또 거기서 이제 막 조그만 약국을 차린 고교 선배가 약이 수북이 쌓인 좁은 공간을 오가면서 조제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애잔한 편린들이 스쳐지나간다.
서해페리호사건, 삼풍백화점붕괴사건, 대구지하철참사 등 수많은 대형참사를 겪어봤지만 유독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함께 겪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삶이 각박해서일까, 미디어들의 경쟁적인 보도 때문인가. 그 무엇보다도 잘못된 어른들 탓에 생때같은 자식들이 덧없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그동안 그 머나먼 울릉도 홍도 흑산도 거문도 등을 여행하고도 아직 살아있음에 가슴을 여민다. 수영 미숙으로 수심 230㎝ 옥외수영장에서조차 당황해 피를 토하듯 살려달라 외치다가 죽다 살아난 경험에 비춰보면 이젠 정말 물이 무섭다. 게다가 몇개월이 지나면 찌든 일상을 해소하려 위험한 섬으로 물밀듯이 바캉스를 떠날 것을 생각하면 잘 망각하는 한국인과 다시 묻혀질 안전불감증이 섬뜩하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살아있음에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며 말 한마디라도 따스하게 하려 애쓴다고 전한다. 술맛은 떨어져 한달 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불요불급한 게 아니면 무슨 물건을 사는 것도 절로 자제가 된다. 남윤철·최혜정·정차웅·최덕하·박지영·정현선·김기웅 등 세월호 참사 의사자 7인은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가슴이 먹먹하다. 이쯤 했으면 슬픔의 출구를 모색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아직은 아무도 나서질 못한다.
곧 가정의 달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움켜쥔 것을 더 베풀고 싶고, 옹졸함과 노파심에서 벗어나 그만 참견하고 싶고, 나에 대한 못난 연민일랑 걷어치우고 체념할 것은 체념하고픈 요즘이다. 하여 물화된 삶에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드는 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