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야근은 생체리듬과 호르몬 분비체계를 교란시켜 암·수면장애·우울증 등 각종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서울 청계천 주변 빌딩들의 불은 꺼질 줄을 모른다. 짧은 시간 고속성장을 이룬 한국에서 야근은 ‘빨리빨리’ 문화에 이은 또하나의 대표적인 기현상이다. 최근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야근 금지 분위기가 조성되고, 고용노동부가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자는 ‘일家양득’ 대국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872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야근현황’을 조사한 결과 60.6%가 ‘일상적으로 야근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야근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빈도는 일주일 평균 4번으로 집계됐다.
장시간 근무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2012년 기준 국내 근로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420시간 많았지만 근로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9.75달러로 OECD 평균인 44.56달러의 65.5%에 불과했다.
잦은 야근은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다. 실제로 직장인 중 64.6%는 ‘야근으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답변했다.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RAC)는 20년 이상 야간작업을 하면 유방암 발생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근거로 야간교대근무를 발암물질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2A(2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2A등급은 암을 일으킬 개연성이 있다는 의미로 에틸카바메이트, 납, 자외선, 디젤엔진 배기가스, 카본블랙(숯검정), 환경호르몬으로 잘 알려진 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DEHP) 등이 포함된다. IRAC는 잦은 야간교대근무가 평균 수명을 약 13년 단축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시애틀 프레드허친슨암연구소도 35~74세 여성 3322명을 조사 및 분석한 결과 야근이 잦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진행성 난소암 발병률이 24%, 경계성 난소암 발병률은 49%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또 지난 1월 영국 서레이수면연구센터 연구팀은 근무시간을 주간에서 야간으로 바꾼 근로자 22명의 신체변화를 조사한 결과 야간근무가 세포를 구성하는 생체분자를 붕괴 및 혼란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미국국립과학원회보(the journal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주간근무자는 혈액검사 결과 전체 유전자의 약 6%가 낮의 특정시간에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야근근로자는 방향을 잃은 배처럼 유전자가 혼란상태를 보였다.
사이몬 아처 영국 서레이대 박사는 “유전자의 97% 이상이 수면시간을 놓치자 혼돈 양상을 보였다”며 “장시간 비행에 따른 시차(jet lag)를 겪을 때 느끼는 불쾌감이 바로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잦은 야간 교대근무는 유전자변형을 유발하고 수면리듬을 깨뜨려 제2형 당뇨병, 비만, 심혈관질환 등의 위험을 높인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잦은 야근이 생체리듬과 호르몬분비를 교란시켜 각종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멜라토닌(melatonin)은 뇌 속 송과체에서 분비되는 신경호르몬으로 세포내 유해산소를 제거하고 발암물질에 의한 세포손상을 막는 등 인체에 유익한 작용을 한다. 해가 진 후 어두울 때 분비량이 증가하고 수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 ‘밤의 호르몬’ 또는 ‘수면호르몬’으로 불린다.
김선영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계속된 야근으로 빛에 노출되면 멜라토닌 분비량이 줄어드는 대신 에스트로겐이 증가해 생리불순, 유산, 유방암, 난소암, 자궁내막암, 전립선암 등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또 잦은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은 뇌의 해마세포를 파괴해 집중력·기억력·인지능력을 떨어뜨리고 만성피로, 불안감, 신경과민, 우울증, 좌절감 등을 야기한다. 조은정 서울시북부병원 스트레스우울증클리닉 과장은 “잦은 야근은 뇌를 혹사시켜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데, 이런 경우 뇌의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세포와 뇌세포를 연결하는 수상돌기가 파괴되면서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줄어든다”며 “이로 인해 기억력, 정보처리능력, 학습능력, 집중력이 떨어져 방금 들은 업무지시 사항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침에 주차한 차를 찾지 못해 헤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야근할 때 빠지지 않는 야식도 건강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김 교수는 “저녁 늦게 음식물을 섭취하면 식욕억제호르몬인 ‘렙틴(leptin)’의 분비가 저하돼 평소보다 과식하게 되고 이는 역류성식도염, 기능성 위장장애, 비만 등으로 이어진다”며 “혈당 및 중성지방의 대사에도 이상이 생겨 심혈관질환과 대사증후군을 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한밤 중에 음식을 먹으면 소화시간이 늦어지면서 멜라토닌 분비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 수면장애가 올 수 있다. 야식에 곁들이는 술 한잔은 건강에 독이 된다. 술을 마시면 기도의 점막이 붓고 점액의 분비가 늘어나 기도가 잘 막히게 되는데, 이로 인해 코골이가 심해져 수면무호흡증의 발생위험이 높아진다.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담배와 술로 풀면 건강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또 주말이나 여가시간에 부족한 잠을 자다보니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야근이 가정파탄의 주범’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잦은 야간근무는 산업재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난 2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발표한 ‘2013 사업장 안전보건활동 면접·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합원 100인 이상 사업장 291곳 중 야간근무를 하는 사업장은 222개(76.3%)였으며, 이들의 산재사고 발생률은 63.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간근무가 없는 사업장의 산재사고 발생률은 44.2%로 유의한 차이가 있었다.
고무적인 점은 야근·과로로 인한 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면서 근로환경 개선의 여지가 보인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1일자로 개정 시행된 고용노동부 관련 고시(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병 및 근골격계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는 ‘질병이 발병하기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 또는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할 경우 업무와 질병의 관련성이 강하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또 업무시간이 주당 평균 60시간을 초과하지 않아도 야간근무 시간·횟수, 업무시간 증가 여부 등을 업무상 질병 인정 심사 때 적극 반영토록 했다.
이에 따라 과로로 사망하거나 병에 걸리면 근로복지공단 심사를 통해 산업재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소 높아졌다. 지금까지는 야근·과로 질병의 연관성을 입증하기가 어려워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9년에는 자원해서 야근을 지속하다 사망했을 때에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는 5주 연속 야근을 하다 숨진 박모 씨의 부인 임모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박 씨가 야간근무를 자청했지만 회사는 단순히 주간근무를 권고했을 뿐 그를 적극적으로 만류하거나 금지시키지 않았다”며 “박 씨가 5주 연속 야근을 하면서 신체에 무리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주 2회 이상 야근은 삼가는 게 좋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이런 경우 생활습관에 약간의 변화만 줘도 야근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평소 10~30분씩 낮잠을 자고 일주일에 2~3회 30분 이상 운동하면 스트레스 관리에 효과적이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커피와 에너지드링크는 몽롱함이나 두통 등 역효과가 날 수 있어 항산화성분이 함유된 차나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게 좋다.
야근할 때 밤을 완전히 세면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받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잠깐이라도 수면을 취해 몸·머리·마음을 쉬게 한 후 다시 일을 한다면 업무효율이 높아진다.
조 과장은 “자주 야근하면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되고 일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려 불안증이나 우울증을 호소할 수 있다”며 “가급적 야근을 피하고, 주 3회 이상 충분한 휴식과 숙면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멜라토닌 분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야간근무를 할 때 조명은 살짝 어둡게 하는 게 좋다”며 “단 시력저하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일정시간 일 한 후 먼 곳을 바라보면서 눈을 쉬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평소 야근이 많다면 시간 날 때마다 운동을 해 체력을 길러두는 게 바람직하다”며 “야근을 하는 중에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거나 몸을 움직여 근육이 뭉치는 것을 막고,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간식거리를 조금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 빵, 과자, 케이크 등 칼로리가 높은 음식보다는 단백질·섬유질이 풍부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