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식남·육식남 경계선상에서 주저하는 남자 늘어 … 연애이론 공부하되 일반화는 곤란
상냥하면서도 강인한 남성을 원하는 여성들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할까 부담감을 느끼는 남성들은 연애심리서적을 탐독하거나, 연애학원을 찾기도 한다
대학생 백 모씨(24)는 소개팅을 앞두고 서점부터 찾았다. 연애심리서적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교환한 뒤 소개받을 여성에 대한 호감이 생기자 이번 만큼은 꼭 잘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 ‘초식남’(草食男)이라 불릴 만큼 내성적인 그는 연애에 앞서 어드바이스를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남녀를 불문하고 ‘여자는 이렇다, 남자는 이렇다’는 식의 연애심리서적에 관심을 갖는다.
한동안 인기 있었던 일본 드라마 ‘전차남(電車男)’에서도 주인공은 이상형 여주인공과 전철에서 마주친 뒤,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신의 심정 등을 올리고 조언을 구한다. 이런 현상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 됐다. 한 남초(男超)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심녀(마음에 두고 있는 여성)·썸녀(‘썸씽’, 연애 관계로 가기 직전에 알아가고 있는 여성)의 마음이 궁금하다거나, 여자친구가 왜 화가 났는지 궁금하다는 등 다양한 고민이 올라온다.
온라인에선 ‘익명’으로 자신의 고민을 상담할 수 있어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들킬 우려도 없고 다양한 조언을 들을 수 있어 애용하는 사람이 적잖다. 특히 ‘우는 소리 하는 남자는 나약하다’는 고정관념 탓에 남자들은 자존심을 세우느라 주변에 자신의 연애 상황을 얘기하기도 꺼린다. 백 씨도 자신의 고민을 올리지는 않지만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사연을 읽어보며 연애에 도움을 받는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과거엔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식하게’ 들이대는 게 연애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도 상처받길 두려워한다. 여자친구나 연애보다 자신의 생활 자체가 더 좋다는 ‘초식남’도 이젠 흔하다. 초식남은 일본 칼럼니스트 후키자와 마키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마치 풀을 뜯는 사슴처럼 남자다움에 구애받지 않는 온화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초식남은 남자다움을 내세우는 기존의 남성상과 비슷한 ‘육식남’과 대비된다. 초식남의 증가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경계가 점차 없어지면서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심리 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사회였다”며 “현대사회는 일하는 여성이 늘고 남녀 역할이 평등해지면서 남성이 져야 했던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 위험을 여성과 함께 분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제 위기, 취업난도 초식남 증가 원인으로 꼽힌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남성은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해 압박을 느끼며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는 성향을 보인다. 우종민 교수는 “남성다움의 굴레에서 벗어난 초식남의 등장은 20~30대 미취업 현상을 반영한 것이거나, 승부근성 없는 세대의 무기력한 단면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아예 환경적 요인 자체가 남자들을 여성스럽게 만든다는 설도 있다. 현대의 스트레스, 대기오염, 환경호르몬 등이 남성성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외부 요소가 정자 활동과 질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한국 성인 남성의 정자 운동성의 경우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상’ 기준을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애에 관심이 없으니 성생활도 저조하다. 다국적 제약회사 릴리사가 세계 13개국 34살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2011년 발표한 ‘글로벌 성생활 패턴 조사’에서 한국이 ‘가장 저조한 성생활을 누리는 국가’로 꼽히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남성은 초식남과 육식남의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애는 하고 싶고, 그렇다고 예전 스타일대로 무조건 들이대기는 어렵고, 또 실패를 두려워하다보니 결국 ‘가이드라인’을 찾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각기 화성·금성에서 왔다고 할 정도로 ‘다른 족속’으로 여겨지는 만큼, 왠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연애에 진입도 못해보고 책만 뒤적거리는 것이다.
우종민 교수는 “의존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소통과 감정교류를 위해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라며 “무조건 들이대는 게 아닌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한 뒤 행동에 옮기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즉, 이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 과정에서 연애서적을 읽거나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대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는 의미다.
문제는 이런 연애지식들을 ‘일반화’했을 때다.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공부한 연애지식을 ‘사람의 감정을 배제한 채’ 상황으로만 판단하는 것이다. 연애는 일반화된 지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연애도 결국 사람 간에 감성을 교류하는 것인 만큼 ‘기계적이고 똑같은’ 상황이란 없다.
또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할 나이대를 가진 남성의 아버지들은 아직까지 가부장적인 성향이 짙다. 이들은 남자답지 못한 남자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 반면 연애 대상인 또래 여성들은 가부장적이지는 않되, 초식남과 달리 강인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상냥한 ‘완벽한 남성’을 원한다.
여자들이 원하는 ‘육식남’은 단순히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며 여자를 우습게 아는 마초가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육식남은 한 여자만 바라보는 일편단심 순정까지 갖췄다. 남성들은 ‘이런 걸 어떻게 맞춰’라고 한숨 쉬면서도 결국 연애서적이나 블로그 등을 탐독하며 나름대로 공부하게 된다.
이런 절박한 남성들을 위한 ‘연애학원’까지 등장했다. 이성을 사로잡는 ‘백발백중 악마의 기술’을 가르쳐준다며 남성들을 유혹한다. 2시간 전화 강의에 50만원, 현장강의는 1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하지만 막상 알맹이가 꽉 찬 강의는 아닌 탓에 불만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 나이트클럽 등에서 대화하는 법 등 일상생활에서 쓰기엔 ‘손발이 오그라드는’ 시덥잖은 기술도 가르친다. 웬만한 여자에게 시전(施展)했다간 ‘뭐 이런게 다 있냐’는 반응만 돌아올 것만 같은 기술이다.
심지어 학원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많이 연애연습을 해 보는 게 가장 좋다’는 황당한 소리도 해댄다. 간절한 마음에 학원을 찾았다가 당황스런 강의에 돈만 날린 남성이 생각보다 많다. 연애 컨설팅 업체는 서울에만 10여 곳, 작년 한해 소비자원에 접수된 관련 피해 신고 건수는 전년보다 9배나 늘었다.
우종민 교수는 “연애를 할 때 의존적인 성향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며 “남녀관계든 뭐든 사람 사이에 관계를 이루려면 적당한 선에서 들이대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조건 ‘성공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거절도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과정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에게 잘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