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진료 및 영리병원 저지를 목표로 예고된 의사들의 총파업이 시작부터 삐끗거리고 있다. 오는 11일 열릴 예정인 총파업 출정식에 장소를 제공하기로 했던 천안 새마을금고연수원이 갑작스럽게 대관 취소를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정치적 성향이 짙은 행사라는 이유로 대관이 취소됐다고 알려졌지만 아직 자세한 정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연수원 측은 “대관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의협 의료제도바로세우기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오는 11~12일 천안소재 새마을금고 연수원에서 ‘전국의사 총파업 출정식’을 갖고 총파업 등 대정부 투쟁 로드맵, 원격의료·영리병원 저지 대책, 건강보험제도 개혁을 위한 대응방안, 국민 호응을 유도하는 대정부 투쟁 성공전략 등을 주제로 심도 있게 논의할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대관 불허 통보에 비대위는 시급히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방상혁 의협 비대위 간사는 “9일 아침 갑작스럽게 새마을금고로부터 ‘정치적인 성격의 행사라 대관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지난 2일 대관비를 전액 지불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외압이 개입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잘못된 의료제도를 바로 세우려는 의사들의 의지를 정부가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라며 정부 외압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복지부 관계자는 이 같은 외압설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부인했다.
의료계 관계자는 “실제로 정부가 압력을 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사태는 의료계의 뜻을 한 곳에 모으는 데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협이 추진 중인 총파업의 타당성을 두고 의료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2000년 의약분업 당시와 달리 파업이 모든 의료인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정형외과 전문의 Y씨는 “개원가에 불리한 원격진료와 영리병원 정책은 분명 개선돼야 하는 게 맞지만 파업 자체는 부담스러운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개원의는 “단체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의사의 명단을 다른 회원들에게 공람해버리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더라도 참여할 수밖에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대학병원은 아직까지 파업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교수님마다 의견 차가 있어 확답할 수는 없지만 2000년 의약분업 때처럼 전 의료인이 한마음으로 단결하는 상황은 분명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파업 목적이 너무 포괄적이고 불분명해 쉽게 공감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수가인하, 포괄수가제 시행, 보험 확대 등으로 대부분의 병·의원이 힘든 상황인 것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파업이 능사는 아니다”며 “굳이 파업을 해야 한다면 더 많은 의사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파업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 간사는 “이번 투쟁의 목적은 단순히 원격의료 및 영리병원 저지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잘못된 의료제도와 이를 만들어낸 관치의료를 타파하고, 올바른 의료제도를 의사들의 손으로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향후 진행될 투쟁에 있어 내부의 단결과 결속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총파업 등에 불참하는 회원에 대한 대응방안 등을 모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이번 파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대전협은 지난 3일 “의협 비대위를 지지하며 이에 따라 오는 11일 ‘2014 의료제도 바로세우기를 위한 전국의사 총파업 출정식’에서 결정되는 사안을 임원총회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며 “전체 전공의 대표의 결의에 따라 현 집행부 총사퇴 및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통한 파업 참여 등을 의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의료계 분들은 높은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총파업 전까지 의료계와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장관은 “협의체를 구성해 구체적이고 구조적인 대화를 하자”고 재차 제안했다. 그는 “사실 의료계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수가이고 이에 대해 분명 정부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며 수가 현실화 의향을 조심스럽게 비쳤다.
이에 대해 의협은 “원격진료 백지화, 영리병원 철회 등에 관한 전면적인 재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협의체 구성이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의사들은 지난해 말 정부가 내놓은 ‘4차 투자활성화대책’에 언급된 ‘보건의료 서비스 활성화’ 방안 중 의료법인도 학교법인처럼 자회사를 설립해 부대사업 등을 통해 수입 기반을 확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겠다는 내용을 영리병원 도입의 초기단계로 보고 있다. 지난해 복지부가 발표한 원격의료도 같은 맥락에서 ‘의료영리화(민영화)’의 일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문 장관은 “의료민영화란 주식회사처럼 외부에서 영리자금이 들어와 비영리 축을 깨는 것이지만 정부는 전혀 그런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보건의료체계 보장성 강화 방안과 보건산업 발전이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보건산업 발전으로 의료산업 수익성이 개선된다면 (병원이나 국민의) 부담도 개선되니 결과적으로는 의료계나 국가에 상호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며 “현 정부가 보건의료 서비스 분야에 불필요한 규제들을 과감히 풀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련의 정부 방안이 기존 보건의료체계 붕괴를 통해 의사들의 입지 약화, 중소병원 및 동네의원의 도산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하는 의료계는 정부의 대화 요구를 거절하고, 국소적인 휴진 투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의사단체와 정부간 감정의 골은 복지부가 9일 주요 일간지에 의료법인의 자회사 광고를 게재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의협·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대한간호협회·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등은 같은 날 성명서를 통해 “이 같은 광고 행위는 보건의료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격의료와 영리병원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라며 “정부는 두 얼굴과 거짓을 버리고 하나의 얼굴로 국민 앞에 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정부가 원격의료 및 영리병원 추진과 관련된 신문광고를 실으면서 국민에게 교묘히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핸드폰 진료의 경우 안전성을 검증하기 위한 시범사업이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지만 광고에서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포장됐다”며 “또 마치 중소병원을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포장하고, 영리라는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의료계의 경고를 계속 무시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