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들보다 잘나야’ 가치관에 증가 … 외적 요건으로 선택 후 공허해도 ‘이대로도 괜찮아’ 자기기만
미국 ABC가 방영한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쇼윈도 부부로 등장했던 브리 밴 드 캠프 부부(ABC방송 캡처)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가 듬직하고 자상한 남편과 부부동반 모임에 나선다. 두 사람 모두 세련된 옷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모임에 도착해 다른 부부들과 담소를 나눈다. 모두가 그들을 ‘환상의 커플’이라고 부러워하는 말에 두 사람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그들은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쾅 문을 닫아버린다.
개그맨 배동성 부부가 지난 3월 결혼 22년 만에 파경을 맞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배동성의 전 부인 안현주 씨는 여성지 ‘주부생활’과의 인터뷰에서 배 씨와의 이혼 사실을 밝히며 ‘쇼윈도 부부’라는 말을 언급해 화제에 올랐다.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마치 잉꼬부부인 양 행동하는 부부를 뜻하는 말이다.
‘디스플레이 부부’라고도 한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공개적인 곳에서는 행복한 부부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개인적인 대화나 부부관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거의 없다. 연예인과 정치인, 기업인 등 유명인들의 이혼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보통 쇼윈도 부부는 유명인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최근엔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런 부부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5월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전국 20~39세 미혼 남녀 299명(남 167명, 여 132명)을 대상으로 ‘연인 간 쇼윈도 관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8명이 “형식적인 연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또 전체 응답자의 대부분인 78.6%(남 88.6%, 여 65.9%)가 연인 사이도 형식적 관계, 즉 ‘쇼윈도 커플’이 될 수 있다고 응답했다.
대학원생 하 모씨(28)도 “회계사인 여자친구가 솔직히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지만 친구들이 부러워할 때마다 으쓱한 기분”이라며 “같은 학생인 여자친구를 만나는 친구들보다 선물 받는 수준이라던가 차로 픽업하러 오는 점 등 편한 점이 많아 사귀는 게 사실”이라며 자신이 쇼윈도 커플임을 인정했다.
이들은 부부간 정서적 친밀감이나 소소한 행복보다는 외형가치에 중심을 두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 소장은 “쇼윈도 부부 중에는 어느 한쪽이 재력이나 명예, 외모 등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에서 우월한 경우가 많다”며 “이런 배우자와 산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퀄리티(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에는 중산층에서 쇼윈도 부부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김 소장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사회적으로 잘나야 한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이런 현상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부는 서로 ‘휴전협정’을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로 마음은 맞지 않고, 마음이 가지는 않지만 각자 가지고 있는 부분을 잃는 게 아쉽다. 자녀양육 문제나 경제적 이유, 체면 등 갖가지 이유로 이혼을 하지 않고 한집에 사는 것에 합의했을 뿐이다. 서로간 대화는 물론 부부관계도 거의 없다. 의무방어전이 따르거나 ‘섹스리스 부부’가 대부분이다.
김 소장은 이런 부부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특징”이라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겁을 먹거나 상처받는 게 두려워 밀어내고 방어하다보니 이런 상황까지 가게 된 경우가 흔하다”고 설명했다. 서로간에 언짢은 점은 늘어나지만 이를 잘 풀지 못하다보니 점점 냉전체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김 소장은 쇼윈도 부부가 되지 않는 예방책으로 “감정에 솔직할 것”을 꼽는다. 물론 감정 자체를 폭발 시키라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선에서 서운했던 점이나 화났던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부부사이에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해서 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당신의 이런 행동이 지긋지긋하고 너무 싫다’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쇼윈도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김 소장은 “쇼윈도 부부가 요새 들어 많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오래전부터 문제가 됐던 것으로 최근 언론 등에 자주 언급되면서 그렇게 느껴진 것으로 보인다”며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의 경우에도 남편이나 자식을 보며 참거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온 분들이 굉장히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그 당시 어머니들은 ‘나만 참으면 시끄러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불편하게 느끼는 행동이 드러나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같은 변화를 눈치 채게 된다. 특히 왜곡된 부부생활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를 정상적인 부부관계 및 가족관계로 인식해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아이들이 ‘가식적인 관계’로 사는 것 자체를 가식으로 여기지 못해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회의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쇼윈도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자신의 삶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혹은 ‘이렇게 사는 게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는 “자기를 속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은 없다”며 “우리는 바라는 것을 쉽게 믿어버리고 만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마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것을 잃고 있음에도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생각에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