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성 수면유도제 ‘졸피뎀(Zolpidem)’을 이용한 각종 중범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 고교 선후배 사이인 의사 2명이 졸피뎀을 탄 칵테일을 먹여 여성을 잠들게 한 후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지난 4월에는 졸피뎀으로 피해자를 잠들게 한 후 살해해 시신을 강에 유기함으로써 실종사로 위장하려한 보험사기단이 적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졸피뎀이 범죄에 악용되는 이유는 다른 수면제에 비해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고 과다 복용시 기억을 잃는 몽유병이나 환각 증세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는 전문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도 졸피뎀을 이용한 범죄를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졸피뎀 ‘수면제의 혁명을 가져온 약’
10년전 처음으로 등장한 졸피뎀 등 ‘비(非)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제는 내성이나 의존성 등 기존 제제의 단점을 개선하고 약효 지속시간은 5~8시간 이내로 대폭 줄여 ‘수면제의 혁명을 가져온 약’이라고 불려왔다. 특히 복용 후 5~20분 내에 약효가 신속히 나타나고 꿈꾸는 단계까지 수면을 유도해 수면의 질을 높였다고 평가받았다. 이들 약물은 중추신경계의 히스타민 수용체를 억제해 졸음이 오게 만든다. 감기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국내에서는 한독약품의 ‘스틸녹스정’(성분명 졸피뎀타르타르산염, Zolpidem)이 2011년 기준 가장 많은 생산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까지 수면제라고 불렸던 약물은 벤조디아제핀 계열 항불안제로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GABA(gamma-aminobutyric acid)’의 중추신경억제 작용을 부추겨 불안을 잠재우고 수면을 유도한다. 깊은 수면을 가능케 하고 잠든 후 각성시간을 감소시켜 많은 사람이 사용해 왔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약효가 남아 졸릴 때가 많고 약물의존도가 높으며 장기간 복용시 기억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졸피뎀은 기존 제제의 이같은 단점을 개선하고 약효 지속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환자와 의사 모두가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수면제로 인식돼 왔다.
2007년, FDA 몽유병 증상 첫 보고
그러나 200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졸피뎀 성분 수면제가 몽유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스티븐 갤슨 FDA 약물평가연구실장은 “암비엔(Ambien, 사노피아벤티스사 제조) 등 졸피뎀 성분 수면제 13종을 복용한 환자 중 수면제 복용 후 잠에서 일시적으로 깨어난 상태에서 운전, 전화통화, 식사 등 일상활동을 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부작용 사례가 10여건 보고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FDA는 암비엔·부티솔 소듐·카르브리탈·달마네·도랄·할시온·루네스타·플라시딜·프로솜·레스토릴·로제렘·세코날·소나타 등 13개 수면제를 제조 및 판매하는 제약사에 이런 부작용을 경고하는 ‘복용안내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깨어났을 때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몽유병 증상은 수면제의 약효와 뇌 기능의 특성이 혼란을 일으키며 발생한다. 수면제는 뇌의 활동을 강제로 억제해 잠들게 하기 때문에 뇌가 스스로 깨어나는 경우 충돌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뇌 부위 중 에너지를 많이 쓰거나 사고·기억·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계속 수면상태를 유지하는 반면 나머지 영역은 활동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잠에서 완전히 깬 뒤 뇌 일부만 활동할 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만취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한 뒤 다음날 아침 자기가 음주운전한 사실을 모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방송인 이윤석 씨도 지난해 SBS ‘스타 부부쇼 자기야’라는 프로그램에서 수면제 복용 후 몽유병 증세를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나는 전혀 기억이 없는데 아침에 아내가 ‘어제 너무 달콤한 말을 많이 해줬다’고 말해 당황했다”고 밝혔다.
졸피뎀 이전 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제는 약효시간이 길고 수면효과가 강력해 몽유병 증상의 발생률이 낮았다. 반면 졸피뎀 성분은 지속시간이 짧고 수면효과가 약해 이같은 부작용이 잘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된다.
과다복용하거나 알코올과 함께 복용하면 위험
몽유병 증상은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보통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는 경우 나타난다. 전문가들은 권장량을 초과해 복용하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김동원 한양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권장하는 졸피뎀의 1일 복용량은 여성의 경우 5㎎”이라며 “이 수면제는 수면효과가 약해 한 알만 먹으면 괜찮으나 많은 양을 복용하게 되면 기억이 전혀 안날 수 있기 때문에 성폭행 등 범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지난 1월 졸피뎀 성분의 일일 사용량을 절반으로 낮춰 처방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이는 FDA가 졸피뎀 함유 제제에 대한 안전성 정보를 권고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시 공개된 임상결과에 따르면 이 성분 수면제를 복용한 일부 환자, 특히 여성에서 혈중 약물농도가 다음날 운전 등 활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높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속방성 제품은 10㎎에서 5㎎, 서방형 제품은 12.5㎎에서 6.25㎎으로 용량을 낮추도록 권고했다.
특히 술과 함께 복용하는 경우 몽유병 증상의 발생률은 급증한다. 알코올은 분해될 때 뇌를 강하게 자극해 잠을 깨우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수면제 효과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체내 알코올이 분해되면 수면효과와 각성효과가 충돌해 몽유병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잇따른 성범죄에서는 졸피뎀을 탄 칵테일 등이 범행도구로 사용됐으며 피해자들은 당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면제로 인한 몽유병 증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극심한 허기짐으로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증상이 가장 많이 보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휴대폰으로 문자나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등 현상도 자주 발생한다.
또 졸피뎀을 복용한 상태에서 각성이 불완전하게 이뤄지면 신체 균형감각이 상실돼 낙상 또는 추락사고를 당할 수도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수면제 복용 중단이 가장 효과적인 예방법
이같은 몽유병 부작용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면제 복용을 중단하는 것이다. 졸음을 최대한 참으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효과적이고 안전하다. 개인사정 상 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전문의와 상담한 후 다른 약물이나 건강기능식품으로 대체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녁 식사를 할 때 바나나, 요구르트, 따뜻한 우유, 참치, 크래커, 땅콩, 버터 등을 섭취하면 이들 식품에 다량 함유된 ‘트립토판(tryptophan)’ 성분이 잠을 청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필수아미노산인 이 성분은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melatonin)’의 분비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잠자기 전 과일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진규 서울수면센터 원장은 “불면증이 있다고 무조건 수면유도제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전문의 진단을 받고 수면유도제를 한 두달 복용하는 것은 괜찮으나 2개월 이상 먹어야 한다면 수면다원검사를 통해 심혈관질환의 위험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작년 12월에는 졸피뎀 등 비(非)벤조디아제핀계 수면제의 실제 약효는 50%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플라시보 효과는 약효가 없는 약을 치료제라고 하면서 환자에게 주면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말하며 가짜약 또는 거짓약(僞藥) 효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국 링컨대, 미국 하버드대, 코네티컷대 공동연구진은 총 43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13건의 임상시험 보고서를 종합분석해 이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결과는 ‘영국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