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에다가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미국 대통령 재선은 이변 아닌 이변었다. 무엇보다도 의료개혁에 많은 욕심을 부렸던 오바마는 보수층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으나 치열한 선거 공방 끝에 국민은 오바마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는 미국 역사, 특히 의료개혁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인들의 역사가 여지껏 자주적이고 지극히 독립적이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적어도 의료제도에 있어서 미국 사회의 흐름은 독립적이었다기보다는 자본 종속적, 권력 종속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술대에 오른 미국 의료제도 글 싣는 순서
<1부> 미국 의료, 환상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2부> 미궁 속 미국 의료, 선진국민이 아프다
<3부> 미국 의료개혁, 일진일퇴의 역사
<4부> 미국 의료제도, 오답 베낀 커닝 페이퍼
1912년 루즈벨트서 1994년 클린턴까지, 미국 의료개혁의 계속된 노력과 좌절
의료서비스에 대해 보험혜택을 받는다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미국과 유럽의 길은 갈렸다. 시작은 언뜻 비슷해 보였다. 1900년대 초, 진보주의(progressivism)가 서구를 휩쓸고 있었다. 1911년에 영국은 노동자가 병에 걸릴 경우 의료 서비스 및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을 통과시켰다. 영국 외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의료보험 등 복지 정책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도 진보의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12년 대선에서 의료보험 확충을 시도했던 테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보수 세력에게 밀리며 낙선하자 미국에서 사회적 의료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legislation)을 발안할 때 공적 의료보험을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의사협회(AMA)뿐만 아니라 지역별, 주별로 미국의학회와 연계돼 있던 많은 고위 간부들이 ‘강제적 의료보장(compulsory health insurance)’라며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결국 1935년 루즈벨트는 그의 법안에서 의료보험 부분을 빼내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번번이 반복됐다. 여러 가지 개혁안이 발안되었지만 의약계의 조직적이고 거센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되고는 했다.
성과는 있었다. 시민운동이 한창이던 1960~70년대에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이라는 이슈에 관심이 쏠리면서 현재 미국 국가보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제도의 기반이 마련됐다. 1965년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메디케어 프로그램을 법안으로 통과시켰다. 물론 이 때도 미국의사협회는 기를 쓰고 이 법안을 반대했으나 모두에게 예외가 아닌 ‘노화’에 대한 두려움은 거대한 의료계 세력을 이기고 메디케어를 통과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에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2년에 메디케어를 장애인 및 말기신장질환(ESRD, end-stage renal disease)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확충하는 법안, 1973년 고용주의 고용인에 대한 의료보험 제공을 필수로 하는 법안을 제안하는 등 작은 진보도 있었다. 그러나 1974년 이러한 노력은 의료보험개혁위원회의 과반수가 미국의사협회의 메디크레디트(Medicredit voluntary tax credit plan 자발적 세액공제 계획, 국민이 원할 경우 세액공제를 의료보험 공제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을 지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닉슨 이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나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에도 진보와 보수 세력은 의료제도를 놓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큰 성과는 이뤄내지 못했다.
그 이후 대표적인 개혁 시도로는 ‘클린턴 계획’(Clinton Initiative)이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퍼스트 레이디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주도권을 쥐고 시행하고자 노력했던 1993년 클린턴 의료계획(1993 Clinton health care plan)이 앞선 수많은 시도들처럼 좌절되자 힐러리 클린턴은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1994년 7월 ‘건강보호 급행버스’(Health Security Express)가 출범했다. 오레건(Oregon)이나 보스턴(Boston) 주 등에서 고속버스가 출발해 워싱턴(Washington)DC 백악관 앞까지 가는 동안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이 미국 의료에 대해 가졌던 불만사항이나 요구사항을 이야기하고, 백악관에서 빌과 힐러리 클린턴을 만나 대화를 가지는 프로젝트였다. 비록 법률 제정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국방송에서 실시간 생중계되고, 신문에 관련기사가 게재되는 등 언론을 통해 미국 의료제도에 대한 전국적, 세계적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식 개인주의·자본주의, 폐쇄적 의료자본주의에 승인 도장 찍어
이같이 미국에서 공적 보험의 확산은 의약계 및 보수세력의 거센 반대로 논란만 빚다가 세월을 흘려보냈지만 미국식 민영의료는 활짝 꽃을 피웠다.
산업화 시대에는 대부분의 질병이 급속한 도시화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오염된 환경에서 매일 과로에 시달렸던 도시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났다. 고용주들은 전염병 등 여러 가지 노동자 건강 문제를 부분적으로 책임질 필요성을 느꼈고, 이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고용주 기반 노동자 보험이었다. 이런 노동자 보험이 지금도 미국에서 사설보험(민간보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용주 기반 보험의 시초가 되었다.
사설보험을 대체할 국가보험을 새로 만들거나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은 계속 제시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 때문에 민간보험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그들만의 정부를 세워 독립한 미국의 독특한 역사는 웬만하면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방관적인 정부가 옳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놨다.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국민성도 제3 보험사들의 정착에 일조했다. 게다가 미국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던 시기에는 지금처럼 경제침체에 빠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 도시 노동자들은 고용주로부터 질병 보험을 제공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민은 국가보험이나 더 넓은 의료 보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1930년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료개혁에 실패하면서 개별적 병원에서 ‘블루 크로스’(Blue Cross)라는 독자적 의료보험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곧 미국의사협회에서도 ‘블루 실드’(Blue Shield)라는 의료보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병원협회와 의사협회는 따로따로 고용주나 회사에 보험 상품을 제공하고 프리미엄을 챙기기 시작했다. 의료 주체들이 자본을 얻고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1940년 정부에서도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설보험에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국 의료제도가 폐쇄적인 의료자본주의로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완강한 보수 세력들이 현재까지도 의료개혁의 움직임을 ‘사회주의 의료(socialized medicine)’라며 공산주의와 연결지어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 의료제도로 인해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는 제약회사, 보험사, 미국의사협회와 보수 세력이 결탁해 포괄적 국가보험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키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의료서비스 확충을 향한 ‘오바마케어’ … 이제 겨우 첫 걸음
이처럼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의료보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안이한 편이었으나 의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이 생기면서 무보험자들에게도 의료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국민적 인식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2008년 대선이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존 매케인(John McCain)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 특히 의료제도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 매케인은 정부의 재정지원 대신 공개시장(open market) 경쟁을 내걸었다. 매케인은 개인의 경우 연간 2500달러(약 250만원)를, 고용주를 통해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가족은 연간 5000달러(약 500만원)를 세액공제해준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또 이미 질환을 앓고 있어 보험에 가입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각 주와 연방 정부가 의료재정 및 의료서비스를 일부 지원해 주는 최소보장건강계획(Guaranteed Access Health Plan)을 제안했다. 만성질환자의 치료에는 보험으로 최소한의 의료를 제공하지만 간병치료나 불필요한 응급치료는 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오바마의 공약은 비슷하면서도 기본적인 면에서 달랐다. 오바마의 경우 ‘범국민적 의료보장’을 목표로 삼고 모든 국민이 국가 제공 의료보험이나 사설보험 중 하나를 반드시 들도록 강제하는 법을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건강 상태에 상관없이 보험료나 의료보장 범위가 동일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일간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Philadelphia Inquirer)는 “매케인의 계획은 각 가정이 의료보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둔 반면 오바마의 계획은 의료보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에 목표를 뒀다”고 비평했다.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의 2008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오바마의 지지자들은 의료 보장을 두 번째로 중요한 안건으로 꼽은 데 비해 매케인의 지지자들은 의료 보장을 이라크 전쟁과 똑같이 네 번째로 중요한 안건이라고 답했다. 또 오바마의 지지자들이 매케인의 지지자들보다 정부가 미국의 의료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성향이 강했다.
결국 접전 끝에 오바마가 2008년 11월 대통령에 선출되고, 지난해 재선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의료제도는 조금이나마 더 범국민적인 보장 제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이는 보수 세력에 대항한 미국민의 승리이며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바람을 나타내는 신호탄이다.
미국 의료제도의 발전 과정은 굉장히 순탄치 못했다. 미국의 자랑거리인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국가정신은 복지, 특히 의료 분야에서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막대한 불편함을 안겼다. 지금도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득 안고 있다.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국민들의 사회의식은 점점 깨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미국 의료제도가 만능이라고 주장하거나, 보장성이 높아 우리나라가 따라할 만큼 완결돼 있다고 말한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비약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