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급성혈액암으로 사망한 부친을 회고하는 어느 중견 언론인의 칼럼을 읽고 크게 공감했다. 임종을 1주일 앞두고 암환자와 그 가족이 겪게 되는 무의미한 항암제 치료와 영양제주사, 고통스런 혈액검사(채혈), 번거로운 방사선촬영(X-레이, CT) 등이 환자를 위한 것인지, 병원을 위한 것인지 되묻는 것이었다.
곧 설이다. 필자도 3년전 이 맘때쯤 설날 연휴가 끝나자 췌장암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S대학병원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병세를 되돌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날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다시 고향집을 들르지 못하고 서울의 황망한 한 노인병원에서 주검이 돼 선산의 흙에 덮여야 했다. 아버지는 반드시 병세가 좋아져 최소한 따스한 늦봄이나 초여름까지는 버텨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천안함 폭침사건(2010년 3월 26일)이 발생한 어수선함 속에서, 필자가 회사일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틈 속에서 쓸쓸히 떠났다.
병원 관계자가 “옆 병실 모 신문사 편집국장은 암 환자 아버지를 모셔놓고 한달이 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당신(필자)도 잘해야 1주일에 한두번 오니 기자란 게 못할 직업인가봐요”라고 한 말이 지금도 가슴 한켠에 걸려 있다.
아버지는 췌장이 제 기능을 못하니 음식의 소화·흡수·대사가 원활하지 못하고 복수가 차오르고 호흡이 곤란해졌다. 노동으로 강건하던 팔뚝이 ET 모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지고, 근력이 바닥나 나중에는 수젓가락조차 쥐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입을 벌리고 호흡하니 목젓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말라 말을 못하고, 의식은 혼미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극심한 암 통증 속에 진저리를 치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암이 급격히 악성화되거나, 순식간에 전이되면 사실 항암제고 영양주사고 무용지물이다. 사망 한달 전까지 아버지는 항암제를 맞았다. 하지만 효과가 없음을 알자 의사는 포기했다.
항암제의 효과는 ‘글리벡’ 정도 말고는 수십년간 거의 나아진 게 없다. 필자도 그걸 잘 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암환자의 약값은 5%만 환자가 본인부담하면 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어떤 치료라도 해야 한다.
표적항암제라는 것도 수개월간 수명을 연장하는데 한달에 약값(보험이든 비보험이든)으로 수백만원이 든다. 과연 비용 대비 효용성을 따지면 말이 안되는 게 대부분이지만 제약사(대체로 다국적 제약사)는 임상통계학과 약물경제학이라는 숫자놀음을 통해 새로운 항암제신약이 분명 삶의 질을 높이고 수명연장의 효과가 있다는 데이터를 만들어낸다. 이걸 가지고 보건당국을 설득하고, 의학회 임원을 찾아다니며 지지해줄 것을 부탁하고, 언론(사실상 의학담당 기자 개인 판단)도 엄호사격하듯 이에 동조해 신약에 보험급여를 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 이같은 항암제 신약이 건강보험 약가를 받으면 결국 우리공동체의 최대공약수로 쓰여할 건강보험재정이 소수 특정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나 제약사의 이익을 위해 낭비된다. 일부 제약사는 보험약가가 너무 비싸다는 여론이 비등하면 꼼수를 쓴다. 예컨대 한달분에 200만원을 보험약가 리스트에 일단 등재해놓고,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 이 중 100만원을 다시 공단에 돌려주는 방식으로 묘책(또는 편법)을 쓴다. 그 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방사선 치료는 한달에 1500만~2000만원 정도 한다. 물론 토모테라피처럼 업그레이드된 비급여 방사선치료를 말한다.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일반 방사선치료보다 정밀도가 높아 정확히 암세포만을 타깃으로 삼아 공격하므로 정상세포를 보호하면서 수개월간의 생명 연장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의료진과 의료장비 회사의 설명이다.
필자가 선친에게 췌장암 토모테라피를 받게 해보니 과연 3개월 남짓한 생명연장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사람에게 수개월 수명연장 효과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는 생명이 늘어난 기간 동안 심신이 온전하지 않기에 과연 인간다운 삶을 누렸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더욱이 방사선치료 전문가 중에서도 토모테라피 등의 신종 방사선치료가 급여가 적용되는 일반 방사선치료보다 비용 대비 효용성이 높은지 회의를 품는 사람이 많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견해를 갖고 있는 S대의 H교수는 자신의 환자를 항암치료하는데 있어서도 결코 기력을 쇠하게 하는 항암치료는 시행하지 않는 소신을 갖고 있다. 반면 Y대의 S교수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용량을 높여서라도) 암을 치료해야 한다는, 격하게 말하면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항암제로 암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실제로 S교수는 임상현장에서 공격적 항암제 투여로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환자가 항암제를 이겨낼 기초체력과 긍정 마인드를 갖고 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재정이 압박받고 있다. 보험자(공단)는 보험료를 인상해 보장성을 높여야 한다고 하고 의사나 제약사도 이에 동조한다. 피보험자(환자)는 두 갈래로 나뉜다. 집안에 병자가 많고 유달리 건강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를 두둔하지만, 다수는 보험료 인상하면 이마에 주름부터 긋는다.
보험료를 현상유지하는 선에서 지금처럼 감기부터 암까지 두루뭉술하게 건강보험을 적용할 지, 경증질환에 대한 보험혜택은 줄이되 암이나 뇌심혈관질환처럼 생명이 위중한 중증질환 위주로 보험혜택을 늘려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고령화는 가속화되고 유소아들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암 전문의, 소아과 전문의, 산부인과 전문의, 정형외과 전문의, 성인병 전문의마다 이해관계가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 암 치료의 현실. 우선 암병동 외래병실에서 변변한 베드도 아닌 간이의자에서 무의미하게 항암제를 맞는 비극적 현실을 놔둬야 하느냐엔 회의가 깊다. 하긴 아주 생짜로 의학을 모르는 것도 아닌 필자도 현실에 순응했으니 ‘반식자우환’(半識者憂患)일 것이다. (양방)의사는 가망없는 암환자를 돌덩이처럼 냉대한다. 회진 횟수나 시간을 줄이는 대신 연구실에 틀여박혀 논문이나 읽으면서 석학이라며 자부한다. 의사 나름의 바쁜 사정이 있다해도 그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말기 암환자에게 큰 희망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 냉담함이 여러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 틈에 근거없는 대체의학의 전문가나 훈훈한 마음을 가진 (한방)의사들이 냉대받은 환자를 위로하며 수익을 챙긴다.
병원에서 죽는 삶,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다. 집에서 어떻게 환자를 간호할, 처치할 방법이 없으니까 병원을 찾지만 항암제 투여나 과도한 검사로 오히려 기력이 더 쇠하는 경우가 적잖다. 대학병원의 경우 병실난 때문에 암 환자는 임종 전 몇 주일 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해야 한다. 병원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선처를 받는 게 사실이지만 대학병원 병실에서 눈칫밥 먹으며 버티는 것도 며칠이지, 누구라도 예외없이 대학병원에서 쫓겨나 요양병원이나 노인병원으로 옮겨가야 한다.
항암제 투여나 불필요한 검사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이로 인한 건강보험재정 낭비를 막으려면 의료계와 보건당국은 암환자 치료정책을 다시 짜야 한다.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행복한 죽음을 안내하는 ‘호스피스’ 제도 같은 게 활성화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