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등 먹는 발기부전치료제와 홍삼 건강기능식품의 인기, 중금속 한약재 불신 등으로 위기에 빠진 한의학계가 (양방)의학계와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천연물신약의 처방권, 현대적 의료기기의 사용권한을 놓고 사사건건 의학계와 충돌하고 있다.
지난달 한의사들만 볼 수 있는 대한한의사협회 인트라넷에는 “대한의사협회가 고용한 것으로 의심이 가는 ‘의파라치’(의료법 약사법 등의 위반여부를 보건소 등에 고발해 포상금을 받는 직업적인 신고자)가 서울 광진구 한의원 서너곳을 보건소에 고발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떴다.
한의원들이 조심해야 할 의료법 위반사항은 △간호사나 간호조무사가 아닌 사람이 치료실에서 종사하거나 △비 간호조무사가 침을 빼주거나 △한의사가 환자를 진료하지 않은 채 소화제 환약 등 한약을 판매하거나 또는 관련 처방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양방)의료기기를 사용하거나 △보건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약침재료로 약침을 놓는 경우 등이다. 한의사들은 실제 주사기를 사용해 약침을 놓으면서도 주사기조차도 한의사들은 ‘주입기’라고 불러야지 ‘주사기’라고 부르면 의료법 위반이다. 그래서 한의사들은 직원들에게 외부에서 문의 전화가 오면 ‘용어’를 주의깊게 사용하라고 교육하고 신신 당부한다.
서울 중구의 모 한의원 원장은 “의파라치들은 특유의 감으로 불법으로 의심되는 것을 일단 사진으로 찍어 보건소에 신고한 뒤 차후에 보건소가 검증해서 위법사항이 인정되면 돈을 받는 식으로 활동한다”며 “정황상 의사협회가 유급으로 의파라치를 보낸다는 증후가 짙다”고 말했다.
의·한간 대립이 이처럼 진흙탕 싸움으로 흐르고 있는데에는 경영위기에 빠진 한의사들의 당혹감과 이 참에 한의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학계의 속셈이 작용하고 있다.
천연물신약의 처방권과 관련, 대한의사협회 산하 한방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유용상)는 한의사의 천연물신약 접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방특위는 “전문성 없는 한의사들이 과학적 임상시험을 거쳐 시판이 허가된 천연물신약(전문의약품 및 일반의약품)을 처방하려는 것은 명백한 의료법 위반행위”라며 “한의사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한방특위는 한의사를 ‘한방사’로 폄하하는 표현을 써 한의사를 자극하고 있다. 이에 한의사협회도 협회 차원에서 대한의사협회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나아가 의사도 ‘양방사’로 불러야 한다고 분노하고 있다.
한의사 최혁용씨가 세운 함소아제약은 자체 한의사전용 쇼핑몰 ‘닥터스샵’에서 한의사에게 아피톡신, 신바로캡슐, 스티렌정, 조인스정, 모타리톤, 사네츄라(전문약)와 심적환(일반약) 등 천연물신약을 1000여 곳의 한의원에 판매한 혐의로 지난 11월말 의사협회에 고발당했다.
하지만 한의사협회는 천연물신약이 전통 한의학에서 오랫동안 써 온 성분을 바탕으로 배합비율을 달리하거나 특정 성분을 가감한 것에 불과한데도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허가한 전문약 및 일반약이라고 해서 한의사들이 처방할 수 없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왜 양의사가 한약을 처방하느냐’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실제로 녹십자가 출시한 관절염치료제 신바로캡슐은 자생한방병원이 오랫동안 사용해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된 ‘추나약물’을 녹십자가 임상시험을 통해 알약으로 제품화한 것이다. 천연물 신약의 처방권 쟁취 등을 위해 출범한 한의사비상대책위원회(회장 안재규)는 식약청이 2008년 고시를 통해 한의사들의 성과물을 이용해 천연물신약 성분에 대한 각종 검사를 면제해준 것도 일방적으로 제약업체를 도와준 특혜정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12일 이같은 고시를 무효화하라는 내용의 행정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다. 천연물신약을 양약으로 허가해 양의사만 처방하게 만든 조항이 말이 되느냐는 입장이다.
천연물신약에 대한 처방권을 놓고 한의사들 사이에 내홍도 깊어졌다. 보건당국 및 의사협회와의 협상에서 타협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정곤 현 한의사협회장이 사실상 천연물신약의 처방권을 양·한방이 공유하자는 입장을 보이자 젊은 한의사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회원들은 회장 불신임안을 내고 탄핵을 추진했다. 지난해 9월과 11월 두차례에 걸친 불신임한 투표에서 의결정족수인 3분의 2를 넘지 못해 탄핵이 부결됐지만 현재 김정곤 회장은 임기만료인 오는 4월을 앞두고 사실상 회무를 포기하고 천연물신약 및 의료기기 사용 등에 관한 대외협상 및 정책결정권을 한의사비대위에 맡겨 놓은 상태다.
한의사들은 (양방)의료기기를 놓고도 오래전부터 의사들과 갈등해왔다. 한의사협회는 X-레이, MRI,CT 등을 한의사도 사용할 수 있게 의료기사(방사선사) 지휘권을 부여해달라고 보건당국에 요청해왔다. 하지만 IPL(자연광을 이용한 피부 박피 치료기), IMS(Intra Muscular stimulaiton, 근육내 전기침 자극치료) 등을 놓고 법원의 판결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뒤바뀌는 바람에 한의사에게 의료기기 사용이 허용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혼선을 빚고 있다.
김지호 한의사비대위 홍보위원은 “IMS는 화교 한의사인 찬군(Chan Gunn)이 개량한 침법의 하나로 의료일원화가 된 미국에서 효과를 얻자 한국에 역수출된 치료법이므로 한의사들만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5월 대법원은 7년 동안 논란이 계속돼 온 IMS 시술에 대해 “침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의사가 침 시술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한의사가 아닌 의사가 침술을 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라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이를 놓고도 의협은 의사 개인의 침 시술에 관한 법원의 판단이지, 의사들이 IMS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내놨다. 더욱이 미세전류를 가해 근육을 자극하는 것은 물리치료의 하나이지 침술이라 할 수 없다는 견해다. 또 경혈에 꽂으면 침술이 되지만 경혈이 아닌 통증 부위에 꽂는 것은 침술이 아니라는 등 다양한 논리로 반박하고 있다.
현재 많은 한의사들이 초음파를 간, 심장, 경동맥, 췌장, 태아 등의 진단에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의사협회는 불법으로 규정하지만 한의사들은 “법원에서 무혐의 및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앞으로도 계속 진단에 활용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안 모 한의사는 “의료기기를 개발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이공계 과학자들인데 의사만이 이를 전유물로 삼는 것은 문제”라며 “보건복지부가 유권해석으로 한의사가 모든 의료기기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편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한의사비대위는 보건복지부를 압박해 천연물신약 단독 처방권을 획득하려 하고 있지만 의사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인데다가 의사수 대비 수적 열세와 예전보다 와해된 결속력으로 인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복지부는 한의사들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의사들의 반발과 혼란을 고려해 ‘모르쇠’ 자세로 관찰만하고 있다.
한의사협회는 한방 탕액의 건강보험 급여화 시범사업에서도 내부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해 11월 1일 전국 일선 한의사와 한의학과 재학생들의 모임인 한의사평회원협의회 회원 4000여명은 서울 가양동 대한한의사협회 회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집행부와 정부를 성토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10월 25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를 열고 올 10월부터 3년간 2000억원을 들여 노인·여성을 대상으로 근골격계 질환(관절염, 요통, 퇴행성 통증) 등의 치료용 첩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한시적인 시범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데 따른 반발이었다. 한의원의 경영이 열악해지고 있는데 집행부가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이다.
김지호 한의사비대위 홍보위원은 “이 조치는 한약조제고시약사(1994년 이전에 졸업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약조제권 부여 시험을 통과한 약사)와 한약사(한약의 조제 판매만을 담당하는 경희대 원광대 우석대 출신)들에게 건강보험에서 정한 100가지 치료용 한방 첩약에 대해 사실상 처방권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정부가 2000억원이 아니라 1조원을 투입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시범사업이 실시되면 한의사가 사실상 한방첩약의 대부분을 처방하겠지만 약사나 한약사가 첩약에 대해 접근하는 것 자체를 막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일부 한의사들은 많은 이윤이 남는 한방첩약이 보험급여를 받으면 장기적으로 한의원 경영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계산도 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0년 8845명이던 한의사는 2011년 2만명을 넘어섰다. 반면 이 기간 한의원을 찾는 환자 수는 30% 이상 줄었다. “이런 식이면 5년 내에 한의원 절반이 문을 닫아야 합니다”(서울 성북구 한의원 원장), “지난달 직원 월급에 한의원 운영경비를 빼고 나니 200만원밖에 못 벌어었어요”(서울 중구 한의원 원장) 등 한의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의사들의 대 의사·약사 마찰이 심해지고, 대정부 투쟁이 강도가 높아지면서, 내부 노선 갈등도 깊어질 전망이다. 천연물신약 시장이나 한방첩약 보험급여시장은 15~25년전 한의사가 전성기를 달릴 때에는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비중이지만 앞으로 급신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갈수록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는 한의사들은 장차 커나갈 싹부터 내것으로 챙겨놔야 한다는 위기감으로 한의원을 벗어나 길거리 투쟁에 나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