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기사에 ‘웰빙’이란 단어를 약방의 감초처럼 써먹은 게 2005년초부터이고 ‘동안’‘안티에이징’을 남발한 것은 2007년 중반부터이다. 최근에는 여러 언론에 ‘힐링’이 부각되고 있다. 청정 유기농 식품과 주말의 취미활동, 친환경 아파트로 대변되는 웰빙(well being, 참살이)은 수년 전부터 ‘또래보다 10년은 젊게 보여야 한다는’ 동안(童顔) 열풍에 힘입어 안티에이징(anti aging,노화방지)으로 살짝 옮겨갔다.
하지만 최근에는 장기 경제불황의 여파 때문인지 다들 자신을 ‘힐링(healing, 심신의 치유)’해달라고 난리다. ‘제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치유해주세요’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다. 대형서점에서도 낙심(落心)한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는 듯한 위로의 책들이 많이 팔린다. ‘힐링 공연’, ‘힐링 푸드’, ‘힐링 투어’, ‘에코 힐링 아파트’ 등 한국이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이미지나 콘셉트를 서비스나 제품에 담아 파는 마케팅도 성행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기(氣)치료 등 대체의학을 통해 심신을 치료한다는 ‘힐링센터’이 등장했다(실제로는 과거에도 있었고 타이틀만 바꾼 것이지만…). 타로 점(占)을 보며 심리치료도 받을 수 있다는 ‘힐링 타로카페’도 선을 보였다. 수년전부터 유행한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든가, 정치권의 ‘안철수 신드롬’도 힐링의 산물이 아닐까.
사실 과거 ‘웰빙’이란 개념도 추상적이고 그때그때마다 의미가 달라졌던 판이라 ‘힐링’이라고 해서 뭐 딱 부러지게 와닿는 것은 없다. 아마 웰빙, 웰니스, 힐링은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힐링’하니 유명한 정신의학 전문가인 이시형 박사가 구상하고 대웅제약 매일유업 풀무원 동아제분 등이 공동 출자해 2007년 9월 선보인 ‘힐리언스 선마을’이 떠오른다. 국내 최초의 ‘웰니스센터’라며 강원도 홍천군 중방대리에 27만평 규모로 들어섰다. 스트레스 술 담배 성인병 등 도회지의 노폐물로 심신이 찌든 사람을 불러다 정화시키는 새로운 건강문화를 착근시키겠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곳이다. 특히 홍천 선마을은 휴대폰과 인터넷이 되지 않고, 입소 기간 중 가족을 만날 수 없으며, 맨발로 산길을 걷는다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큰 호응이 없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1박에 서울 특급호텔보다 비싸니 중산층이 올 수 없었고, 부유층은 다들 자기 별장이나 은밀한 휴양지가 있는데 굳이 여러사람이 북적대는 그 곳에 갈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세계적 장기불황을 앞둔 시점에서 힐링 사업은 매출신장에 한계를 보일 것으로 짐작된다. “누가 웰빙,동안,힐링 안 좋아하나. 돈 없어서 못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대다수 서민 중산층의 넋두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필자가 보기엔 취업도 안 되고, 괜찮은 일자리(대기업과 공기업, 전문직, 공무원 등)와 그렇지 않은 직장과의 소득차가 크고, 경제는 물론 교육 의료 등 사회전면에 걸쳐 양극화는 심해지고, 그나마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자기 위치에서 자리 보전을 하기 힘드니 자꾸 힐링을 찾는 것 같다.
과거 산업화시대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가난을 극복하려 했고, 한 줌이라도 더 성취하려 했으며, 우리 부모들(1930~1940년대생)은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버텨냈다. 하지만 요즘은 지나치게 중장년은 중장년층대로 회의와 좌절에 쉽게 빠지고 엄살이 심하다. 젊은이들은 너무 나약해서 부당한 현실에 반항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 중 나은 게 386세대처럼 보인다. 어느 보수적 지식인들은 386세대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공로로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그 이전 세대보다 실질적으로 고생은 덜 했으면서도 경제적 사회적 이익은 누릴대로 다 누린다는 편협한 인식으로 세대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세대인들 이 한국의 삶이 고달프지 않으랴.
최근의 세태는 심할 정도로 경쟁을 회피하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만 하면 ‘스마트폰’ ‘태블릿PC’에 빠져 은둔의 삶을 살고 있다. ‘대~한민국 짜자작작’하면서 길거리 응원에 나가면 젊음이고 패기인가. 그게 한국인의 열정을 대변하는 전부인가.
힐링 바람에 매몰된 사회는 한국이 나약해진다는 징조로 들린다. 물론 무조건 ‘하면 된다’는 긍정의 과잉이 우울증 자살 인격장애가 양산되는 ‘피로사회’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힐링에 집착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힐링이 지나치면 한국사회에 ‘집단적인 무기력증’을 보일지 우려된다. 마치 1990년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것처럼.
힐링을 하려면 자기확신과 긍정 마인드가 충만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지속적인 노력과 거기서 얻은 실력과 성취감에서 나올 것이다. 필자의 절친인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왜 그렇게 환자를 삭 녹여서 힐링을 잘 하는가”.답은 이렇다.“별 비결은 없어요. 환자의 생각에 공감해주고 환자 스스로 갖고 있는 해답을 드러내면 돼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저마다 갖고 있는 욕망의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욕망이 강하고 성취동기로 이를 실현해내는 사람은 날 찾아올 리 없지요”
힐링이란 단어를 앞세워 ‘위로’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마케팅이 늘고 있다. 하지만 힐링하고 싶어도 돈 없으면 힐링이 안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표적 힐링 도서로 손꼽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인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어설픈 말재주로 젊은이를 위로하려 이 책을 쓴 게 아니고 젊은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수 있도록 조언하기 위해서”라고 집필 목적을 말했다. 실제로 그의 강연을 들어보니 그냥 위로가 아니라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남과 차별화되게 열정적으로 꾸려나가는 응원이 그 책의 핵심 실체였다.
현실에 굴복하고 고민에 발목 잡힌 채 우물쭈물 주저앉는 청년층에게 힐링은 권장되어서는 안된다. 중·장·노년층에게도 마찬가지다, ‘피로는 제게 맡겨달라’는 피로·숙취 해소음료, 태반주사, 마늘주사 등에 플라시보(placebo, 가짜약 효과)를 거는 것도 좋지만 삶의 주인공으로 내몫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억울하고 부당한 사회에 당당하게 맞서 쟁취하는 게 진정한 힐링이 아닐까. 다만 너무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당장 정신과 상담이나 가족 또는 지인의 무조건적이고 따스한 위로와 약물치료를 권한다. 일단 위기를 넘기고 나야 힐링할 힘이 생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