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적극적인 인수합병(M&A)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전도유망한 바이오 플랫폼 기술과 신약후보물질 등을 보유한 기업과 손을 잡고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특히 최근엔 제약·바이오 동종 기업 간 인수합병 외에도 사업 다각화를 모색 중인 대기업 등 이종 기업 간 인수합병 모색이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먼저 GS그룹이 주축이 된 GS컨소시엄이 휴젤의 최대주주 글로벌 사모펀드(PEF)인 베인캐피탈로부터 경영권을 포함한 지분 42.9%를 인수하기로 하고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GS컨소시엄은 지주사인 GS를 중심으로 중국 바이오 투자 전문 운용사 C-브릿지캐피탈, 중동 국부펀드 무바달라, 국내 PEFIMM인베스트먼트 4자 연합으로 구성됐다. 거래 규모는 2조원 안팎 수준으로 GS가 10~20%의 자금을 대고 나머지 자금은 투자자들이 책임지는 구조로 알려졌다.
휴젤은 매분기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국내 보툴리눔톡신 제제 1위 업체로 최근 중국 등 글로벌 시장 진출에 나선 기업이다. 올해 2분기 매출은 64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3.7% 증가했다. 그러나 신세계백화점이 화장품사업과 보툴리눔톡신사업의 시너지를 올리기 위해 지난 6월 휴젤에 눈독을 들였다가 철수한 것은 높은 인수가도 작용했지만 대웅제약과 메디톡스 간 법적 분쟁에서 생산 균주의 오리지널리티를 밝혀야 하는 부담도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휴젤은 아직 균주의 출처나 확립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동제약은 신약개발 전문기업인 아이리드비엠에스 주식 260만주를 인수하고 최종 지분율 약 40%를 확보해 계열사로 편입하기로 했다. 아이리드비엠에스는 일동제약 중앙연구소의 사내 벤처 팀으로 시작해 지난해 독립한 저분자화합물 신약 디스커버리 전문 바이오테크다.
CJ제일제당은 미생물 사업에서 더 큰 효과를 내기 위해 마이크로바이옴 기술 업체 천랩을 약 1000억원에 인수했다. 오리온은 지노믹트리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50억원을 투자했다. 혈장 제제 전문기업 SK플라즈마는 신규 바이오 시장 진출을 위해 11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하는 과정에서 지난 7월 28일 티움바이오를 끌어들여 300억원을 투자받았다. SK케미칼은 지난 11일 J2H바이오텍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합성신약 플랫폼인 옵티플렉스(Optiflex) 기술 및 표적단백질 분해(Targeted Protein Degrader) 기술 등을 활용해 신약을 공동연구하기로 했다. J2H의 상장 전 투자 유치에도 참여키로 했다.
이처럼 최근 대기업들이 제약바이오 분야 M&A에 대거 참여하는 것은 이례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금 여력이 넉넉한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최소 10년 이상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데다 성공에 이르기까지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큰 제약바이오 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LG그룹, CJ제일제당그룹, 한화그룹, 아모레퍼시픽, 코오롱 등이 일찍이 신약개발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사업을 접거나 대폭 축소한 바 있다. SK그룹이 그나마 미국 신약개발과 코로나19 백신 국산화 착수 등에 성공한 것은 최근 2년새에 일어난 작은 성공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대기업들이 앞서 성공한 사업을 인수하거나 연계된 사업과 시너지를 창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전세계적 고령화를 앞두고 헬스케어산업이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장, 고부가가치, 독점력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사업 분야 중 하나여서다. 아울러 글로벌은 물론 국내 시장이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것도 이 사업에 진입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원이 한정된 한국에서 특화된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찾아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제약바이오산업만큼 유망한 분야도 별로 없어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대기업들이 시장을 살펴보는상황이다. 더욱이 30년 넘게 제약바이오산업에 투자를 이어온 SK와 10년 만에 세계 최대 바이오시밀러 위탁생산 업체를 키워낸 삼성의 사례가 다른 대기업에게 참여 동기를 부여했다.
이러한 대기업들의 M&A 시도와 관련해 업계의 반응은 일단 고무적이다. 개발단계에서부터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들어가는 산업 특성상 거대자금을 보유한 대기업이 뛰어들 경우 풍부한 자금력과 인적자원, 사업 인프라 및 노하우를 바탕으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대기업이 M&A를 통해 참여할 경우 업계의 아킬레스건인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실제로 한국이 제약바이오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글로벌 빅파마에 비해 작은 외형이다. 수 년전부터 연매출 1조원이 넘는 회사가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10개에 불과하다. 2014년 유한양행이 첫 매출 1조원을 기록한 이후 6년 만에 녹십자, 셀트리온, 종근당, 광동제약, 셀트리온헬스케어, 삼성바이오로직스, 한미약품, 대웅제약, 한국콜마 등 9곳이 지난해까지 추가로 매출 1조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유한양행은 외자사 의약품 대행판매, 셀트리온은 자전거래(매출 돌리기), 광동제약은 생수 및 식품사업과 기업구매대행 사업에 따른 거품 매출 등 내용이 부실하다. 대웅제약의 경우 메디톡스와 분쟁을 벌이면서 3년째 회사가 어수선한 분위기다. 한미약품도 기술수출한 몇몇 신약후보물질 등이 줄줄이 좌절을 겪고 최근 호중구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의 미국내 허가가 지연됨으로써 상승기류가 잠시 주춤한 상태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는 실질적으로 글로벌 제약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나 임상비용을 감당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의 제약바이오 기업 M&A는 선택이 아닌 필수며 시급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대기업 주도의 M&A가 업계의 희망사항처럼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에 무조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개발의 복잡다단한 과정과 실패할 경우 감당할 리스크가 자못 커서다. 더욱이 완벽한 오리지널 제품이 아닐 경우 관련 기업과 소송 등 분쟁에 휘말리면서 본 게임을 벌이기 전에 와해될 위험 부담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장성이 가장 유망하고 전문성을 갖춰 기업의 신성장 동력으로 제약바이오 기업만한 것이 없다는 인식에는 이견이 없고 대기업들 역시 기존 제약바이오 기업을 통해 빠른 성장을 도모하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만큼 대기업 주도의 M&A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인 윤희숙 의원은 최근 “국내 제약업계의 연구개발 능력 향상을 위해서는 수백 개 업체의 인수합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학자 출신의 날카로운 시각이지만 업계 현장에서 얼마나 먹힐지 궁금하다.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기술력은 낮고 자본력도 부족하며 해외 비즈니스에 대한 노하우 역시 일천하다. 새로 진입하려는 대기업들이 새겨 들어야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