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마약으로 취급되며 부정적 이미지가 박혀 있던 대마가 최근 급격하게 옛 때를 벗겨내고 있다. 최근 대마에 포함된 칸나비디올(Cannabidiol, CBD) 성분이 약물로서의 가능성을 보이면서 의료 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의료 목적의 대마 사용을 합법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2018년 말 산업용 재배 및 CBD 생산이 합법화된 후 관련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의료용 제품과 더불어 화장품 성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대마 씨앗 ‘헴프시드’도 건강기능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대마는 생산성이 높고 줄기뿐만 아니라 잎·씨앗·뿌리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다수확·다용도 작물이다. 국내에서는 대마 줄기를 이용해 전통 옷감인 ‘삼베’를 만들어 왔지만, 대마 잎을 태워 환각 작용을 즐기는 ‘마리화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잡아왔다.
대마 속 CBD의 발견 … 치료 효과 입증
국내에서 대마는 ‘사회적 문제’로 논란이 돼 마약류로 분류하고 엄격하게 통제해 왔다. 1976년 대마관리법이 별도 제정됐으며, 2000년부터는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마약류관리법)에 의해 대마의 생산·매매·흡연이 전면 금지됐다.
대마 품종은 크게 흡연용 ‘마리화나’(Marihuana)와 산업용 대마 ‘헴프’(hemp)로 구분된다. 흔히 ‘대마초’로 불리는 마리화나는 환각성이 높은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etrahydrocannabinol , THC)이 함유돼 주로 기호용으로 쓰인다. THC는 가장 강력한 정신활성 성분이다. 대마꽃과 잎사귀, 씨앗의 껍질에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다.
헴프시드는 THC가 0.3% 미만 함유된 품종을 말하는데 주로 섬유산업의 원료로 이용됐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이 그것이다. CBD를 활용하기 위한 의료용 대마 역시 THC 함량이 낮은 저마약성 품종군으로 뇌전증, 치매, 신경질환 치료 등에 효능이 있는 CBD를 다량 함유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의료목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CBD는 환각 효과 없이 통증과 발작을 감소시키며 특정 질병이나 암 치료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아 뇌전증 중 희귀난치성 질환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됐다.
최근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정신건강연구소 중개정신의학연구실의 마이클 블룸필드(Michael Bloomfield) 교수팀은 CBD가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로 들어가는 혈류를 개선한다고 밝혔다. 이는 CBD가 알츠하이머 치매 같은 기억 기능이 손상되는 뇌질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최근 “CBD가 향전신성 약물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아 사람에게 남용이나 의존 가능성이 없다”며 “지금까지 순수한 CBD의 사용과 관련된 공중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관련 문제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하고 국제마약통제 하에 두지 말 것을 유엔 마약위원회(Commission on Narcotic Drugs, CND)에 권고했다.
이같은 이유로 전세계적으로 의료용 대마가 합법화되는 추세다. 시장조사기관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세계 대마 시장 규모는 12조원으로 2026년까지 116조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美 대다수 주, 중국서 의료용 대마 이미 합법 … “지역경제 활성화 및 세금 수입 늘어”
미국에서는 CBD 성분의 내복액으로 GW파마슈티컬스(GW Pharmaceuticals)의 미국 내 자회사 그리니치바이오사이언시스(Greenwich Biosciences)가 출시한 ‘에피디올렉스’(Epidyolex)를 2018년 7월 뇌전증 치료제 승인했다. 소아 악성 뇌전증의 일종인 레녹스가스토증후군(Lennox-Gastaut syndrome, LGS) 과 영아 중증 근간대성 뇌전증인 드라벳증후군(Dravet syndrome, DS)의 2세 이상에 투여할 수 있도록 치료제로 허가한 것이다. 또 CDB 성분을 올림픽 도핑에서 제외했다.
미국 대부분 주에서 의료목적의 대마 사용은 이미 합법이다. 캘리포니아주 등에선 성인의 기호용 대마 사용도 합법이다. 여기에 뉴저지주를 비롯해 애리조나주와 몬태나주, 사우스다코타주가 이번 대선과 동시에 기호용 대마 판매 합법화 여부를 놓고 주민 투표를 시행할 예정이다.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이미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을 크게 앞지른 상황이다.
미국 주 정부들이 대마 합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은 이미 대마가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기엔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역 경제 활성화와 세금 수입 때문이다.
제이 로버트 프리츠커(Jay Robert Pritzker) 일리노이주 주지사는 “마리화나는 세금 수입 증대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불법 마약의 피해자였던 지역사회 주민들이 사업 참여를 통해 경제적으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일리노이주에선 지난 1월 합법화 후 첫 6개월간 2억3900만달러 이상의 기호용 마리화나가 판매됐다. 일리노이주는 기호용 마리화나에 향정신성 성분인 THC의 함유량에 따라 10~25%의 판매세를 부과, 주 정부는 이 기간 5200만여달러의 조세 수입을 거뒀다. 이는 예상치 2800만달러의 2배에 달하는 세수였다.
2018년 10월 캐나다는 우루과이에 이어 전세계 두 번째로 기호용 마리화나의 재배 및 판매를 전면 합법화했다. 이후 캐나다에서는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대마를 재배·소지·소비할 수 있다. 온라인이나 우편을 통한 구입·판매도 허용했다. 대마 재배를 위한 대출과 투자도 가능해졌다.
시장조사업체 브라이트필드그룹은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올해 캐나다의 기호용 마리화나 산업 매출이 지난해 8억8000만달러에서 17억달러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고 2025년에는 시장 규모가 54억달러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료용까지 포함한 2025년 캐나다 마리화나 산업 전체의 추정 매출액은 58억달러(6조6700억원)에 달한다.
중국도 2003년부터 의료용 대마를 일부 지방에서 합법화했다. 중국은 전세계에서 대마 관련 특허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 태국은 2018년 동남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했다.
세계적인 추세에 국내에서도 2018년 12월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해 3월 12일부터 해외 대마성분 의약품의 수입과 사용을 허용했으나 국내에선 재배가 되지 않아 전량 수입해왔다.
올해 7월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및 풍산읍 일대와 경산시 등 총 5개 지역이 산업용 대마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면서 국내에서도 의료용 대마 재배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수출 목적에 한해 추출을 허용해 국내에서의 산업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국내는 대마의 종자, 뿌리, 성숙한 줄기에서 추출한 카나비노이드 성분 중에서도 THC 함량이 0%인 CBD 성분에 한해 수입·사용을 허가하고 있다. CBD 함량이 높은 대마엽은 마약류로 분류된다.
건기식‧화장품 업계도 대마추출물로 술렁
일부 국가에서는 CBD 추출물을 활용한 제품을 건강기능식품이나 화장품으로 상용화해 판매 중이다.
국내 산업계도 대마 사업을 블루오션으로 보고 국내 대마 관련 마약류 기준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콜마그룹 계열사 콜마파마가 CBD 화장품 사업에 눈독 들이고 있다. 올해 초 콜마파마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CBD 원료를 국내 화장품 제조사에 공급하는 ‘인체용 CDB 사업’을 추진했으나 식약처가 해당 원료에 대해 반려 처분하면서 원료수입 절차에 차질을 겪고 있다.
펫푸드 업계도 CBD 성분으로 개발한 반려동물 영양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성분으로 개발한 반려동물 영양제가 반려동물의 스트레스를 낮춰 공격성과 분리불안, 뇌전증, 항암, 치매 등 질환을 개선하는데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6대 슈퍼푸드에 ‘헴프시드’ 포함 신드롬 일어나기도 … 대마 성장 견인 한몫
대마의 씨인 ‘헴프시드’도 대마 산업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웰빙 열풍 속에서 미 타임지은 헴프시드를 ‘세계 6대 슈퍼곡물’ 중 하나로 선정했다. 할리우드 스타나 미국의 유명인들이 먹는다고 알려지면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곡물인데도 단백질 함량이 높아 특히 다이어트에 좋은 고단백 식품으로 유명하다.
헴프시드는 대마의 씨이기는 하나 THC 함량이 낮은 헴프 품종의 씨를 활용하고, 거기서도 THC 성분이 포함된 껍질 부분을 제거하기 때문에 환각이나 중독 우려에서 자유로운 게 특징이다. 다만 CBD 성분은 거의 없거나 극미량만 함유돼 있다.
헴프시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풍부한 영양소 때문이다. 단백질 함량은 두부의 5배 정도이며, 몸에서 생성되지 않는 필수아미노산을 비롯해 20종의 아미노산이 골고루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백질 함량에 비해 탄수화물은 적게 들어있어 다이어트 식단에 활용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헴프시드에 식이섬유는 바나나의 1.5배, 칼슘은 달걀의 1.2배이며, 불포화지방산은 고등어의 11.3배 들어 있다. 심혈관기능 개선에 좋은 오메가3·6 지방산이 모두 포함돼 있다. 비타민 B1과 엽산은 각각 브로콜리의 1.7배다.
미국에서는 관련 제품이 이미 시판 중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헴프시드’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과자와 노인 간식에 첨가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 중이다.
대마 산업화, 산 넘어 산 … 규제 개혁 시급
그러나 의료·바이오산업 소재, 슈퍼푸드 등 팔방미인인 대마가 국내에서 산업화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우선 법규 문제다. 식약처는 2015년 2월 ‘식품의 기준 및 규격 일부개정고시’를 통해 대마씨와 대마씨유의 THC 허용 기준을 각각 1kg당 5mg, 10mg으로 관리하고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대마씨와 대마씨유에 CBD 기준도 신설해 CBD 허용 기준을 각각 1kg당 10 mg/kg 이하, 20 mg/kg 이하로 설정했다.
대마씨나 대마씨유를 직접 원료로 수입해 기준 규격에 맞춰 식품 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으로의 활용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식약처가 안전성을 두고 논란이 있는 대마씨와 대마씨유 성분을 건강기능식품으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어서다.
또 화장품에는 대마씨와 대마씨유 원료 사용에 대한 기준‧규격은 없지만 ‘화장품 성분 중 마약 성분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화장품 원료로서 CBD를 ‘활용할 수 있다, 없다’ ‘얼마만큼을 써도 된다’ 고 논하기에 앞서 무(無) 마약성분임을 입증해야 하니 사실상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식약처는 대마씨나 대마오일은 대마 씨앗의 껍질에 THC라는 환각성분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제거하고 국내로 들여오는 데 대마씨앗과 대마유의 THC 기준은 설정해놨으나, CBD 경우는 환각성분은 아니다 보니 그동안 따로 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 CBD가 악성 소아 뇌전증 치료 등 의료용으로도 사용되자 이에 대해서도 관리를 강화하는 거꾸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국내 대마 생산기반이 거의 무너진 상태라 산업화도 쉽지 않다. 1970년대 초반 3000ha가 넘었던 재배면적은 대마관리법 시행 이후 급속하게 감소해 2018년 기준 전국 대마 재배면적은 19ha, 농가는 52가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로부터 삼베가 유명했던 경북 안동·상주, 전남 보성, 충남 예산 등지에서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경북 헴프 특구에서 생산된 제품은 규제에 따라 국내에서는 유통할 수 없고 전량 수출만 할 수 있다. 관련법이 개정되거나 식약처를 비롯한 각 부처들이 합의하면 향후 변경될 여지는 있다. 의약품 개발을 위한 임상 과정에서 국내 환자들이 참여하는 등 제한적 사용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업계에 따르면 CBD를 주성분으로 한 원료의약품 개발은 3~4년, 완제의약품 개발에는 7~8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CBD가 필요한 환자들은 당분간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