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2300만명을 넘어서면서 이 혼란을 종식시켜 줄 백신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고 있다. 이에 치열한 백신 개발 경쟁만큼이나 세계 주요국들의 백신 수량 확보 경쟁에도 불꽃이 튀기고 있어 흥미롭다.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백신에 대해 일부 선진국이 이를 경쟁적으로 선점하면서 저소득 국가에 공급할 물량이 부족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백신 공급 불평등 문제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백신 사재기 열풍에 뒤처지지 않게 한국 정부도 수요 초과에 대비한 물량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백신 내셔널리즘’ 속 각 국가별 백신 확보 상황을 알아본다.
미국, 전체 인구가 두 번 이상 접종 가능한 물량 확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오는 11월 재선 성공을 위해 백신 및 치료제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고조되는 백신 쟁탈전에서 미국은 가장 많은 물량을 확보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사노피, 화이자, 노바백스 등 유력 제약업체와 코로나19 백신 공급 계약을 맺으며 앞장서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공급계약을 체결한 물량은 약 8억도스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3억3100만명의 미국 인구가 두 번 이상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다.
최근 계약을 체결한 제약사는 모더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현지시각) 백악관 브리핑에서 모더나와 1억회분에 달하는 백신 후보물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약 15억달러(1조7775억원)에 이른다.
지난 5일에는 미국 존슨앤드존슨과도 코로나19 백신 1억회 투여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미국 정부가 추후 2억도스 분량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으며 계약규모는 10억달러다. 존슨앤드존슨은 이 돈으로 현재 초기 단계 임상시험 중인 자사 백신 개발과 생산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이밖에 미국정부는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옥스퍼드대가 공동 개발한 백신 3억회분을 비롯해 미국 화이자·독일 바이오엔테크, 프랑스 사노피·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백신 각각 1억회분을 확보했다. 또 노바백스 백신 각각 1억회 분을 선점했다.
일본, 접종 후 부작용 국가가 배상책임 논의
일본도 백신 선점 경쟁에 가세했다. 이미 일본 인구에 맞먹는 접종분은 확보한 상태다. 일본은 미국 노바백스의 2억5000만 도스를 포함해 3개 공급업체로부터 4억9000만 도스의 백신을 제공받기로 했다. 아스트라제네카·옥스퍼드대가 개발 중인 백신은 내년 초부터 순차적으로 1억2000만 도스를 공급받기로 합의했다. 미국 화이자·독일 바이오엔테크의 공동개발 백신도 내년 6월까지같은 분량을 받기로 했다.
지난 20일 일본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제약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정부가 대신 져주는 방안을 가까운 시일 내에 코로나 분과 회의에서 논의하고, 관련 법을 다음 국회에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백신 협상 과정에서 일부 제약사는 ‘백신을 접종한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요구하면 정부가 이를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19 백신은 전세계적인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개발 속도를 내기 위해 개발기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하고 있다. 개발사는 접종 후 발생 가능한 손해배상 등에 대한 부담을 덜고 싶고, 코로나19 조기 방역에 실패한 일본 정부로서는 빠른 백신 확보가 절실하다. 특히 내년 여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시급히 백신을 통한 면역력 형성으로 완벽 방어를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국가가 제약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대신 져주는 특례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긴급한 상황에 한해 이미 도입한 바 있다. 일본은 2009년 신종플루 백신을 수입할 때 해외기업을 대신해 국가가 배상한다는 내용을 법에 포함시켰다.
EU, AZ 백신 3억도스 확보 … 호주, 전국민에 백신 무료 제공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주도하는 ‘포괄적 백신동맹’(Inclusive Vaccines Alliance, IVA)은 지난 6월 15일 아스트라제네카로부터 4억도스를 공급받는 계약을 맺었다. 7억5000만유로에 3억도스를 우선 받고, 백신이 효과적이고 안전할 경우 1억회분을 추가 구매하기로 아스트라제네카와 합의했다. 또 지난 20일 독일 바이오텍 기업 큐어백과 잠재적 코로나19 백신 최소 2억2500회 분량 구입과 관련한 사전 협상을 마쳤다고 밝혔다. EU는 존슨앤드존슨과 사노피와도 계약을 논의 중이다.
브렉시트 단행으로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은 백신 확보에서도 독자노선을 걷는다. 영국은 지난 14일 노바백스가 개발 중인 백신 9000만도스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영국 정부는 옥스퍼드대에서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이 성공할 경우 모두 1억도스를 공급받는 내용의 계약을 다국적 제약사인 아스트라제네카와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이 사전 확보한 코로나19 백신은 무려 3억4000만회 분량이다. 영국 인구 1인당 5회 가량 접종할 수 있는 양이다.
호주는 지난 18일 아스트라제네카와 백신공급 협약을 체결했으며 2500만명의 전국민에게 백신을 무료 제공한다고 밝혔다. 캐나다 정부도 지난 5일 화이자, 모더나와 각각 백신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구체적인 수량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 ‘COVAX’ 참여 계획 … 국민 70% 접종 분량 확보 목표
한국도 백신 도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21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코로나19 치료제·백신개발 범정부 지원위원회 5차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백신 도입 및 예방 접종 전략을 논의했다.
정부는 우선 백신 공동 구매·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에 참여하기로 했다. 코백스는 세계보건기구(WHO), 감염병혁신연합(CEPI),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등이 중심이 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이달 말까지 참여 의향 확인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코백스 공동 투자금은 제약회사의 백신개발 비용으로 쓰이며 백신이 생산에 들어가면 참가국은 인구의 최소 20%에 해당하는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백신 개발 선두에 있는 기업과 협상도 계속 추진한다. 복지부는 지난달 21일 아스트라제네카·SK바이오사이언스, 이달 13일 노바백스·SK바이오사이언스와 각각 백신 공급을 위한 협력의향서를 체결했다. 또 백신 개발 선두에 있는 글로벌 기업에 선수금을 지급해 물량을 미리 확보할 방침이다.
정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국민이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할 계획이지만,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경우 집단 면역형성을 할 수 있는 수준(인구 70%선)의 물량 확보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백신 확보는 개발 동향 등을 고려해 2단계로 추진된다. 1단계로 예방접종 우선권장대상자 등을 고려해 1600~2000만명분(3200~4000만 도즈, 1인당 2도즈 가정)의 백신을 우선 확보하고, 2단계로 수탁 생산 또는 직접 수입 등으로 백신을 추가 도입한다.
코로나19 백신이 도입되면 정부는 미국·영국 등 선진국 사례를 고려해 1단계로 보건의료인·사회필수시설 종사자, 군인, 노인·기저질환자 등 건강취약계층에게 접종하고, 2단계로 성인·아동 등에 접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는 ”한국은 백신 생산능력이 있는 믿을 만한 회사들이 있기에 아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백신이 개발되면 우리 기업에서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며 “생산지인 한국이 우선적으로 확보할 물량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