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한의사협회가 사실상 한의대과 의대에 흡수 편입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군불을 때고 있다. 한의협은 오는 8월 6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포스트 코로나19, 한의사 한의대를 활용한 의사인력 확충 방안 국회 간담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선 한의사와 한의대생을 활용해 의사인력을 증원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한의대와 의대의 복수학위 및 통합의대 개편, 복수면허 응시 등 제도 개선을 놓고 발제와 토론이 이뤄진다. 최혁용 한의협 회장이 ‘통합의대 도입(개편) 방안’, 신상우 한국한의학교육평가원장이 ‘통합의대를 향한 한의과대학의 변화’를 주제로 발표한다.
이 자리엔 두 단체와 한국한의과대학·한의학전문대학원협회,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관계자도 참석해 토론을 벌인다. 한의협 관계자는 “한의과대학과 의과대학의 복수학위 및 통합의대 개편 추진, 복수면허 응시 허용 등의 제도 개선을 통해 의료인 수급을 정상화는 방안을 논의하고자 간담회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국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OECD 평균 3.3명의 66% 수준인 2.3명이다. 그 중 한의사를 제외하면 2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지난 23일 오전 여당과 정부는 당정 협의를 갖고 2022학년도부터 향후 10년간 의과대학 입학전형을 연간 400명씩 총 4000명 증원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최혁용 한의사협회 회장은 지난 1월 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0년 신년교례회에서도 ‘통합의사’ 제도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통합의사’ 제도는 한의사와 의사가 동등한 의료인으로서 검사와 진료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의사가 X-레이와 초음파 등 진단 의료기기를 제약 없이 사용하고, 의사도 한의사 진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취지다.
국내 한의사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의료인은 미국, 중국에서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한의학 치료법 중 하나인 추나요법은 미국에서 오스테오페틱의학(Osteopathic Medicine, 정골의학)으로 불린다. 미국에서 추나요법 등으로 환자의 근골격계 질환을 치료하려면 ‘오스테오페틱 의사’(Doctor of Osteopathic Medicine, DO) 면허가 있어야 한다.
DO는 일반의사(Doctor of Medicine, MD)와 동일하게 약물 처방과 수술을 할 수 있다. 국내 한의사와 업무 성격이 비슷하지만 권한은 훨씬 많은 셈이다. 중국은 의사, 중의사, 중서결합의사 등 3개 면허시스템이 존재하며 서로 특별한 제약 없이 진료와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다. 한국과 달리 중의사가 현대 의료기기도 사용한다.
국내에서 의료일원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부터 의료일원화가 논의됐다. 의업이란 이권을 놓고 서로 싸우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 수를 늘리려는 정부 정책과도 궤를 같이 했으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의대 입학점수가 고공행진하고 1993년 ‘한약분쟁’에서 한의협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면서 이 시기엔 의협이 의료일원화를 제안해도 한의협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 고자세를 보였다.
이후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면서 양방과 한방은 더욱 선명하게 갈리는 국면을 보였고 이 때부터 약사의 한약 또는 생약 유사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취급 강도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면 의약분업 협상에서 약사회에 밀렸다고도 볼 수 있는 의협은 당시 유성희 회장 주도로 한의계에 의료일원화를 제안했지만 역시 한의협의 소극적 대응으로 무산됐다.
2003년 의협 김재정 회장 집행부는 국립한의과대학 설립에 대한 반대 논리로 의료일원화를 들고 나왔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판결이 뒤집히긴 했지만 점진적으로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판례들이 점진적으로 나오면서 의사의 절대 비교 우위가 침해당하고 있다. 이또한 의사들 입장에서는 의료일원화, 즉 한방의 흡수통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당위성을 제시했지만 양한방이 대립만 하고 있을 뿐 뾰쪽한 협의는 없었다.
2005년에는 약대 6년제가 추진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일반의약품 확대나 약사의 제한적인 처방권 확보를 견제하기 위해 의협은 ‘유보된 현안’이었던 의료일원화를 한의협 측에 제안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당시 의협 집행부는 “의사 본연의 사명을 다해 국민 건강을 수호하자는 취지의 의료일원화 추진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한의사협회에 정식 요청하기도 했다.
대략 2005년을 기점으로 한의대 입학점수가 의대보다 낮아지고 최근에는 약대와도 적잖은 격차를 보이는 데다가 이 때부터 ‘비아그라정’ 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나 다양한 건강기능식품이 한의사들의 수입을 갉아먹으면서 한의원의 수익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유명세를 타는 일부 한의원이나 기업형 한방병원을 제외하고는 동네 한의원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
1999~2000년 MBC 드라마 ‘허준’을 등에 업고 한방이 한창 뜨고 있을 당시에는 의료계가 의료일원화로 손을 내민 반면 한방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2008년 이후엔 한의계에서 먼저 의료일원화를 화두로 꺼내들었다.
2010년 의협 경만호 회장 집행부는 양한방일원화 TFT를 추진했다가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경 회장의 순수성과 유연성이 당시 한의협 집행부와 소통으로 의료일원화에 성공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2005~2008년을 기점으로 하향세에 접어드는 한의계를 바라보던 의사들은 “합치면 우리만 손해다”라는 인식 아래 일원화를 반대해오고 있다.
2012년 노환규 집행부 이후 의협은 줄곧 한의사의 현대의학 진단기기 사용, 물리치료 도입, 교통사고 환자 유인, 첩약급여 시범사업 등에 대해 과학적이 부족하고 안전성·유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가해오고 있다. 이에 한의학계에도 기존 전통 한방치료에 대한 학술적 증거를 세우기 위해 서양의학에 기반한 실험과 논문 작성을 통해 정당성을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의료일원화를 시도한 가장 최근 사례는 보건복지부(당시 문형표 장관)가 2015년 의료와 한방의료 교육과정, 면허 제도를 하나로 통합하는 의료일원화·의료통합을 2030년까지 끝내는 정책 방향을 한의사협회와 대한의사협회에 각각 제안하고 협의체를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협의체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유야무야됐다.
한의계 관계자는 “현 집권여당이 의협과 각을 세우고 상대적으로 한의협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최혁용 한의협 회장이 당정의 의사 증원 정책을 호기로 삼아 한의사를 의사 제도에 소프트랜딩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의학의 고유성을 수호하자는 ‘매파’ 한의사는 장노년층의 소수 세력이고 40대 이하 세대는 전폭적으로 양방과 통합되길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협회 내 의견 통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의협은 젊은층은 물론 중견 의사들까지 반대하고 있다. 양약 처방권은 물론 현대의학 치료기기를 활용한 진단과 치료에 한의사 출신 의사들이 진입하게 되면 기존 의사들의 파이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총 12개 대학에서 한의과(총 정원 726명)를 개설하고 있고, 이 중 5개 대학이 의과와 한의과를 함께 개설하고 있다. 해당 대학은 경희대(정원 109명)·원광대(90명)·동국대(72명)·가천대(31명)·부산대(25명/학·석사 통합과정) 등 5개 대학이며 한의과 정원은 모두 327명이다. 726명 전부나 327명 이상, 또는 양한방 집행부의 합의에 따라 축소된 500~600명의 한의대생이 장차 의사로 편입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게다가 기존 2만7000명이 넘는 한의사 중 절반 가량인 1만3500명이 소양교육을 통해 의사로 편입된다면 의사 수는 현재 12만명 선에 더해 조만간 13만5000명에 이르게 된다.
정부와 여당은 공식적으로 한의사 및 한의대생을 의사 인력 증원에 감안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러 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자세일 뿐 한의협의 공세와 의협의 방어에서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전격 허용할 가능성도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의협의 조직력이 5~10년 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한의협 주도의 의료일원화를 막아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며 “지금의 야당이 지리멸렬해 의협을 도와줄 여력도 없고, 의사인력 증원을 바라는 여론이 더 크기 때문에 절실함이 강한 한의협과 맞서 싸우면 이길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