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9일부터 마스크 5부제로 공적마스크를 공급하기 시작한 뒤 매일 아침 약국 앞에는 마스크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에 각 약국은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아침에 마스크 판매 순번 번호표를 발급하고 오후에 판매하거나 아예 약국 문을 아침 일찍 열고 마스크를 판매한 뒤 본래 조제 업무를 하는 곳이 많다.
잔여 마스크 수량을 묻는 질문에 답하고 판매하기도 바쁜데 마스크를 2장씩 소분 포장해야 하는 상황이라 약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약국에 공급되는 공적마스크 상당수가 1팩에 5장이 들어있거나 25~50매가 한번에 포장돼 있다. 하지만 1인당 판매 수량이 2매로 제한되면서 약국에선 이 제품을 뜯고 2장씩 포장해야 한다.
대형 약국은 인력을 나눠 분업하면 조제업무와 병행이 가능하지만 1~2명이 근무하는 소형 약국은 소분포장을 직접 하느라 조제 업무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정부가 KF94 규격보다 필터 성능이 덜한 KF80 마스크를 추가로 공급해 수급량을 늘리겠다고 나서자 약사들은 소분포장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공급량이 평일 250장 대비 100~150장 늘어난 400장이 공급돼 업무 과부하를 경험한 터라 이같은 불만은 커지고 있다. 서울 중구 A약사는 “소분 포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추가 공급은 더 이상 무리”라며 “몰려드는 손님들로 공적마스크 마크가 달린 스티커는 붙이지도 못한 채 판매했다”고 토로했다.
지난주엔 서울의 한 약국에서 약사가 맨손으로 마스크를 소분하는 영상이 올라오면서 위생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현재는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마스크를 비닐에 넣어주고 있지만 포장안 된 마스크를 받아든 소비자의 표정은 편치 않다. 일부 소비자는 격렬히 항의하거나 보건소에 신고하는 사례도 알려졌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허 모씨는 “낱개 포장이 안 된 마스크를 직접 담아주는 것을 보고 오염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며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있긴 했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한약사회는 지난 16일 정부가 유통업체인 지오영·백제약품 등 물류센터에 군 인력을 투입하고 유통업체가 소분 포장을 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지만 약사회와 유통업체 간 소분 포장을 하기로 합의만 했을 뿐 구체적 대안은 나오지 않았다. 지오영과 백제약품 측이 추가적으로 부담해야 할 인건비·시설비와 초기 소분 작업 기간에 정상 공급을 위한 추가 재고 확보, 정부 지원 범위 등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점을 감안할 때 즉시 시행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약사회 관계자는 “식약처는 KF94에서 KF80으로 공급 제품을 변경하면서 2매 포장을 늘려달라는 건의를 적극 수용한다는 입장”이라며 “제조업체 중 대용량 포장이 불가피한 곳의 물량을 도매업체가 다시 소분 포장해 인력이 모자라는 소규모 약국에 우선 공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휴대 간편한 소독용 알코올스왑 재고 급감 … 에탄올·솜 품귀 조짐
약국에선 최근 에탄올과 알코올스왑(1회용 알코올 솜) 수요가 급증하면서 재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알코올 스왑은 주사를 놓거나 채혈하기 전 주사 부위를 소독하는 데 쓰인다. 의료진이 아닌 일반인으로는 주로 당뇨병 환자가 채혈하는 데 이를 썼지만 휴대폰, 책상 등 일상 생활공간을 자주 닦고 휴대하기 간편한데다 이미 가격이 많이 오른 손 소독제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게 소문나면서 물량이 들어오는대로 판매되고 있다.
기자는 지난달 초 알코올스왑 1박스(100매)를 약국에서 3000원에 구입했으나 18일 기준 온라인 구매가는 7000~8000원까지 치솟았다. 이 마저도 품절된 곳이 많았고 알코올 스왑 구입이 어려워지자 직접 에탄올과 솜으로 스왑을 만드는 방법까지 등장하면서 에탄올도 덩달아 귀한 몸이 되고 있다. 에탄올 1통(250ml) 기준 보통 1000원선에 판매되던 게 요즘엔 3000원 이상으로 오른 곳도 꽤 많다. 해외 직구 상품도 선보이고 있다.
서울 관악구 A약사는 “지난달에는 알코올스왑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3월 들어 갑자기 늘었다”며 “꾸준히 구입하던 기존 당뇨병 환자가 사용할 제품도 부족한데다 에탄올까지 재고가 빠지기 시작하면 이들 품목도 수급 대안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약국에 의료용품을 공급하는 한 업체는 “손소독제 물량이 예전보다 늘어나 완전 품절은 아니지만 소독솜과 에탄올이 많이 부족한 상황은 맞다”고 했다. 이 업체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 위생용품 공급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며 “정부가 통제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되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약국에 분풀이 민원 늘어 … 경찰 주기적 순찰 돌기로
지난 11일 부산 동래구의 한 약국 앞에서 60대 남성 A씨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시민 때문에 통행이 불편하다며 골프채를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에 경찰이 출동해 A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체포하는 일이 벌어진 뒤 부산시약사회는 부산지방경찰청에 ‘공적마스크 판매 약국 치안’ 관련 특별요청 공문을 발송해 중점순찰 경로에 약국을 포함하고 구매 대기 줄이 길면 질서유지 등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 주요 지역에서도 이같은 민원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마스크 판매 대기번호가 본인 앞에서 끊겨 화를 내면서 약국 기물을 파손하거나 마스크 5부제와 상관없이 마스크를 판매해달라며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규모 약국 중 여성 약사가 혼자 운영하는 곳이 상당 수여서 추가적인 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부산 경찰청은 지구대를 통해 순찰을 강화하고 약국에 특별순찰 지역 포함 안내문을 부착하기로 했다. 또 약국에서 112로 신고가 접수되면 살인·강도 사건에 준하는 ‘코드 ZERO’로 신고를 접수해 출동한다. 부산시 사례가 알려지자 각 시·구 약사회는 해당 지역 경찰청에 약국 안전을 위한 순찰 강화를 요청하는 등 마스크 판매로 인한 약국 피해 최소화에 나서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B약사는 “약국을 혼자 지키다가 간혹 화를 내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손님과 대면하면 무섭다”며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어려운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공적마스크를 판매하고 있지만 불만있는 사람들을 이해시키다 보면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