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영업사원 스스로 목숨 끊어 … ERP 통한 ‘쉬운 해고’ 늘자 다국적제약사 노조 설립 급증
머크(Merck) GM(general medicine, 순환기내분비)사업부 소속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대전지역 영업사원으로 알려진 A씨는 지난달 21일 새벽 자택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민주제약노조 한국머크지부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9월 본사가 GM사업부를 정리하면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희망퇴직프로그램(ERP, early retire program)을 신청해 오는 5월 퇴사할 예정이었다. 이 부서는 지난해 11월 30일부로 업무가 종료됐다.
조영석 한국민주제약노동조합 한국머크 지부장은 “고인은 ERP를 신청하지 않으면 서울로 발령낼 것이라는 압박을 받아왔다”며 “ERP는 사실상 강제 퇴사를 종용하는 것으로 A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2차 ERP 신청기간 마지막 날(지난해 11월 28일)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덧붙였다.
한국머크는 국내 진출한 다국적제약사 중 최근 노사갈등이 가장 고조됐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지난해 GM사업부 직원 35명을 대상으로 ERP를 진행하겠다고 일방 통보한 게 결정적이었다. 이 부서가 담당하는 당뇨병약인 ‘글루코파지정·엑스알서방정’(성분명 메트포르민, metformin)는 GC녹십자에, 고혈압·협심증 치료제인 ‘콩코르정’(비소프롤롤푸마르산염, Bisoprolol hemifumarate)은 대웅제약에 판권을 넘겼다.
당시 회사 관계자는 “회사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일반의약품 사업의 아웃소싱(외주)을 감행하게 됐다”며 “이번 결정으로 영향받는 직원을 위한 지원 방안을 모색해 해당 팀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회사 측은 해산하는 사업부 직원을 대상으로 사내외 전직·이직 기회를 제공하고 경력 개발을 위해 최대 2년간 경영학 석사(MBA) 및 기타 석사 등 학위 과정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머크 노조는 사측의 일방적인 사업 개편 통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머크 본사와 협의해 사전 협상과 고용 승계 등 안정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해왔다.
당시 조영석 민주제약노조 한국머크지부장은 “ERP 대상 사업부 소속인원 35명 중 회사에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야 한다”며 “회사를 떠나더라도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반강제적으로 퇴사하는 것은 반드시 막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머크는 당시 국내 판권을 가져간 제약사 두 곳 모두 고용 승계를 희망하는 직원에게 최대한 이직 기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계약사항에 포함된 것처럼 발표했으나, 머크 관계자 확인 결과 고용승계 관련 사항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조 지부장은 “판권을 넘기는 국내사에 고용승계 및 전직원 대상 ERP 실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경영상황 상 인원 감축이 목표라면 전직원을 대상으로 해야 맞는데 일부만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ERP는 특정인을 지정해 퇴직을 종용하는 ‘찍퇴’”라고 주장했다.
그는 “GC녹십자로 이직을 희망한 3명은 받아들여졌고 대웅제약으로 가려던 직원 5명은 인·적성 검사와 면접까지 봐 결국 1명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떨어졌다”며 “이직자 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 이마저도 떨어뜨리는 것은 일자리를 소개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GC녹십자로 이직한 인원 중 1명만 영업부로 이동하고 나머지 2명은 마케팅 직군으로 갔다”며 “전폭적 이직 지원이 아닌 헤드헌터를 통해 연락·상담하는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또 “오래 근무한 직원은 퇴직금이 상대적으로 많은 데 반해 나이가 젊고 어린 자식이 있는 직원은 여유를 부릴만큼 퇴직금이 많지 않다”며 “당장 열심히 일해야 하는 직원에게 MBA 과정에 입학해 공부하라는 발상 자체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머크 측은 지난해 11월 27일까지 2차 ERP 신청을 받으면서 추가 ERP는 없으며 신청하지 않으면 지방 근무자 전원을 서울 본사로 출근시킨다며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GM사업부 35명 중 24명이 ERP를 신청했고 끝까지 신청하지 않은 직원 11명은 본사로 발령났다. 본사 발령 인원의 절반인 5명은 지방 근무 인력으로 회사로부터 이주지원금을 받아 서울에서 임시로 생활하고 있다.
조 지부장은 “이들 11명은 제대로 된 자리도 배정받지 못해 원형 탁자에서 근무하고 있다”며 “프로젝트 서포트(Project Support Associate, PSA) 부서를 만들어 2주에 1회 임시업무를 주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고 다른 팀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의 일만 배정하는 사실상 대기발령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이 영업 업무를 했는데 본사에 있는 한 영업직 빈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압박받는다”며 “이들은 40대로 이직하기 애매한 나이인데다 이직 시 금전적·경력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조 지부장은 “독일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로 본사 차원에서 이같은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노사가 협력해 원만히 매듭짓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머크 관계자는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께도 위로와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한다”며 “회사는 이번 사안을 매우 엄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유가족에게 회사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하고 성심을 다해 최대한 예를 갖춰 유가족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고용승계 지원에 대해 이 관계자는 “타사 이직 지원을 위해 회사 설명회를 개최하고 지원절차 안내, 인터뷰 주선을 했지만 참여율이 낮았고 타 기업의 직원 선발 권한은 고유의 영역으로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고용승계에 준하는 수준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머크에 남길 희망하는 직원 중에선 면접을 통해 타 부서로 이동한 사례가 있고, ERP를 선택한 직원에겐 전·이직 컨설팅 서비스를 3개월간 제공하는 등 직원들이 변화에 적응하고 회사 내외부에서 다양한 기회를 찾도록 지원하고 있다”며 “MBA 교육비 지원은 직원 건의에 의해 결정된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ERP 진행 과정에서 회사가 강제력을 행사한 부분은 전혀 없고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있다”며 “법에 의거한 노조 활동을 존중해 서로에게 최적의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머크 측은 “이번 사건은 당사의 비즈니스 운영(직판 영업 중단)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선을 그어 갈등의 여지를 남겼다.
독일 본사에서는 이번 사건을 예의주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머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경영진에 외부인을 배제한 가족기업을 고수했다. 그 속에서 가업 승계 원칙 확립, 가족경영 참여·역할에 대한 원만한 합의를 통해 잡음없이 기업을 경영해 와 독일 사회에서 신뢰도가 높다.
이 회사는 ‘사람 중심경영’을 모토로 직원을 최우선으로 대우했다. 이에 직원들은 전쟁 속에서도 원료를 안전한 곳에 숨기는 등 회사의 진심에 헌신적으로 보답했다. 이는 초토화된 공장을 다시 돌리는 원동력이 돼 세계2차대전 패전 후 폐허 속에서 오늘날 머크를 재건하는 초석이 됐다.
이같은 역사를 무색하게 하듯 최근 머크를 포함한 글로벌 제약사들이 고용보장 없는 희망퇴직 등을 일방적으로 시행해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불안정 고용을 우려한 직원들이 노조 설립 등으로 선제적 대응에 나서면서 민주제약노조에 가입한 다국적제약사가 어느새 20개사에 달했고 노조원이 2000여명에 이른다.
해마다 연간 실적을 마감하는 11월에서 1분기 실적이 나오는 4월 사이에 유독 제약사 영업사원 등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 이미 10년 전부터 퇴직종용·불법리베이트·실적압박 등으로 매년 참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영업사원이 회사 옥상에서 투신하는 등 작년에 4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머크 노조 설립 당시 한 노조원은 “언제 일터가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일정 수준 금전적 보상을 받고 퇴직하는 길밖에 없다”며 “다수의 다국적기업이 이같은 제도를 활용해 사실상 ‘손쉬운 해고’를 자행하고 있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게 된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번 사건으로 숨진 머크 직원 A씨 유족은 회사 측에 “유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회사가 도와달라”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