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개인정보보호법, 신용정보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이르는 ‘데이터 3법’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데이터 기반 신사업에 대한 기대를 보이고 있다. 업계는 그동안 맞춤형 헬스케어, AI(인공지능) 신약개발 등과 관련해 환자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를 주장해왔다.
데이터 3법에 따르면 연구개발(R&D) 등 목적으로 ‘비식별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실명, 주민등록번호 등이 삭제된 가명 정보를 기반으로 연구하거나 공익 통계를 작성할 때 당사자 동의 없이 데이터를 수집·가공할 수 있다. 이에 빅데이터 활용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관련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 스타트업 등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네이버가 지난해 12월 대웅제약과 설립한 헬스케어 합작법인 ‘다나아데이터’와 카카오가 이달 서울아산병원과 AI 기반 의료빅데이터 기업 ‘아산 카카오 메디컬 데이터’를 만든 게 대표적이다.
그동안 국내서는 신약개발을 위한 공공의료데이터 활용이 사실상 어려웠다. 건강보험관리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각각 3조4000억건, 3조건의 빅데이터가 축적돼 있지만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매년 건강보험으로 진료받은 환자의 비식별정보가 약 3% 정도만 공개되는 수준이다. 이에 제약사들은 매년 필요한 데이터를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이번 입법을 환영하고 나섰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데이터 3법의 국회 통과는 AI, 빅데이터를 활용한 신약개발과 맞춤형 정밀의료 시대를 앞당기는 헬스케어 혁신의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맞춤형 치료제 개발 가능성 제고에 따라 국민건강 증진이라는 공익적 가치도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향후 시행령 개정과 가이드라인 마련 등 후속조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규제혁신이라는 당초의 법 개정 취지가 충실히 반영되고 엄격한 개인정보 보안대책도 함께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지난 15일 희귀난치질환 치료제 등 첨단 신약과 혁신 의료기기 개발, 국내 질환연구 선진화를 목표로 의료데이터 등 관련 규제를 대폭 철폐하는 내용의 ‘4대 분야 15개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을 공개했다.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한 개선안에 따르면 연내 의료데이터 활용 지침을 마련해 환자 질병정보를 신약·의료기기·질환연구에 쓰도록 지원하고, 폐지방이나 인체파생연구자원을 활용한 신약개발을 독려하기로 했다. 또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의료기기 품목 신설과 함께 신의료기술평가제도를 개선하고 ‘바이오 명장’ 제도를 도입해 전문인력 양성에도 나선다는 방침이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병원이 방대한 의료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가명 조치 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미비하고 공익적 연구에만 활용해야 하는 등 제약이 컸다고 소개하면서 의료데이터 활용 확대를 위해 의료분야 가명·보안 조치 절차, 제3자 제공방법 등을 포함한 ‘의료데이터 활용 지침(가이드라인)’을 개인정보보호법 시행되는 올 하반기에 수립하기로 했다.
현재 의료폐기물로 분류돼 재활용이 어려운 인체지방을 줄기세포추출 등 의약품 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폐기물관리법도 개정된다. 장내미생물인 마이크로바이옴, 줄기세포를 배양한 유사 인체장기 세포집합체(오가노이드) 등 파생연구자원을 이용한 신약개발·질병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심의 가이드라인도 만든다. 바이오 생산공정 관리 등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를 중심으로 ‘명장’ 인증제를 신설해 바이오 분야 숙련기술 축적과 전문인력 양성을 장려한다.
혁신 의료기기 육성을 위해 VR·AR 기반 의료기기 품목을 신설하고, 신의료기술평가에 반영하는 등 제도 선진화도 추진한다. VR·AR 기반 인지행동치료용 소프트웨어 등 융복합 의료기기에 대한 별도 허가품목 신설해 관리하게 된다.
신의료기술평가는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의 기술·질환 범위를 확대하고, 혁신기술 재신청 절차를 마련해 혁신기술 인정이 활성화되도록 개선할 방침이다. 지난해 3월 도입된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은 유효성 평가 문헌이 축적되지 않은 첨단의료기술에 대해 잠재가치를 평가해 시장진입을 허용하는 제도다. 혁신기술 품목도 현재 AI의료기술 의료로봇 등 6개에서 정밀의료, 줄기세포치료, 디지털치료제 등 9개 분야로 확대한다. 대상질환도 암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 등 4개에서 질환 제한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기존 기술로 분류되면 혁신기술 신청이 불가능 한 현재 기준을 개선해 재신청 절차를 마련할 계획이다.
전체 신의료기술평가 대상 중 약 절반을 차지하는 체외진단검사는 지난해 4월부터 감염병 분야에 시범 적용 중인 ‘선진입-후평가’ 제도를 전체 체외진단검사에 확대 실시한다. 예상 시점은 올해 2분기다. 기존 검사법과 유사한 단순 개량형 체외진단검사는 기존 기술로 분류해 신의료기술평가 없이 건강보험에 등재한다.
건강관리서비스 인증제를 도입해 소비자가 서비스 선택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올 하반기엔 ‘건강 인센티브제’ 시범사업이 실시된다. 건강생활 실천 결과에 따라 포인트 지급하고 건강검진이나 본인부담금 납부 등에 사용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검사 서비스(DTC) 허용 항목도 질병예방·건강관리 등 웰니스(Wellness) 검사 분야 ‘DTC 항목 고시’를 개정해 현 12개에서 56개로 늘릴 예정이다. 이달 중 시범사업에 착수해 추가로 20여개 이상의 항목 확대에 나선다.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각자 운영하고 있는 유전자검사기관 인증제 효율화를 위한 ‘인증제 단일화’ 도입을 검토키로 했다.
이중 또는 불필요한 규제의 철폐도 시작된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입주기업의 생산시설 규모 제한을 현행 3000㎡ 상한에서 5000㎡ 수준으로 완화해 제품개발 후 별도 생산시설을 마련해야 했던 부담이 줄어들 전망이다.
의료기기법에 따라 전기적 안전성 안전관리가 의무인 1·2등급 의료기기는 해당 안전인증을 면제해 식약처 의료기기법과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생활용품안전법 등 이중규제를 없앤다. 환경부담금 납부 면제대상인 1회용 의료기기 등 품목을 의료기기법령에 따라 정비·확대해 의료기기 제조·수입업체 부담도 경감한다.
또 의료기기에 대해 민간광고 사전심의제도를 도입, 민간 전문성을 활용해 광고규제를 완화한다. 규제 개선이 완료된 식물체 기반 바이오의약품 품목허가 가이드라인, 화장품 개발 시 연구기관이 참여한 사실에 대한 표시광고 등은 홍보를 강화한다.
복지부는 바이오헬스산업 혁신전략 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업계·연구현장 중심의 상시적 규제 발굴·개선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AI·정밀의료 등 첨단 융복합 의료기술 인정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라며 “이번 규제개선으로 4차산업혁명 시대의 대표 미래 먹거리인 보건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 성장기반이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부의 이번 규제 완화가 가시적인 효과로 이어질지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데이터 3법 이외에 의료정보를 활용하는 데 제약이 되는 의료법 개정이 전제돼야 한다. 현 의료법 취지상 개인이 익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료정보를 공익적으로 활용해도 좋다고 동의해야 빅데이터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홍남기 부총리는 같은 날 △보건의료 빅데이터센터 △국립보건연구원 유전체센터(바이오) △데이터 중심병원 지원센터(병원) △인공지능(AI) 신약개발센터(신약) △피부·유전체 분석센터(화장품) 등 5대 분야별 보건의료 데이터센터를 내년까지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29년까지 총 100만명 규모 유전체 빅데이터를 모아 희귀 난치질환 원인 규명과 개인맞춤형 신약개발에 활용할 방침이다. 이런 계획이 실질적으로 업계에 도움이 돼야 하며, 장차 불거질 시민단체의 개인정보 안전성·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문제 제기나 인권·윤리 논란도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AI 신약개발은 기술적으로 걸음마 단계여서 정부의 후속 지원이 요구된다. 업계 관계자는 “AI 신약개발은 일부 기업이 플랫폼 기술을 활용해 겨우 후보물질을 발굴할 수 있는 정도여서 당장 의료 데이터를 활용할 수준은 아니다”며 “기술적 역량을 강화해 스스로 데이터를 리딩하고 학습하려면 적잖은 시간과 경제적 투자를 들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국내 데이터만으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임상시험 등을 진행하기는 어렵다”며 “해외에서 어차피 추가적인 재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