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고령화와 독거노인 증가로 의사가 환자의 집을 찾아가 진료하는 왕진 제도가 의료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해 8월 왕진 시범사업 계획이 처음 공개된 이후 대한의사협회는 전 회원에게 불참을 독려하는 공문을 뿌리며 결사 반대를 외쳤고 상당수 개원의들이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올해 초 막상 시범사업이 시작되자 전국 348개 의원급 의료기관이 참여를 신청하면서 ‘의협 패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시범사업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전망은 썩 밝지 못하다. 사업에 참여한 의사 중 상당수는 왕진 진료수가를 현행보다 높이지 않으면 1회성 정책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왕진을 선택하는 환자 유출로 파이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다수 의사들의 강력한 반대여론도 극복해야 할 산이다.
왕진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의사가 찾아가 진찰·치료하는 의료행위로 의료 환경이 열악했던 1980년대 초까지 성행했다. 당시엔 왕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의사가 거부하기라도 하면 지역사회에서 몰상식한 의료인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응급의료시스템이 정착되고 병원 내 진료를 기본으로 규정한 의료법이 제정되면서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에도 왕진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현행 의료법은 환자·보호자 요청에 의한 응급상황이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한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방문진료, 즉 왕진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가 병·의원에 내원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진찰비만 받을 수 있고 왕진에 소요되는 시간, 교통비 등을 따로 보전해주지 않아 실제로 이뤄지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의료인프라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거동을 못하는 독거노인의 수가 늘면서 체계적인 왕진 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약 355억원의 예산을 들인 이번 시범사업엔 총 348개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 의사의 진료과목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 않은 일반의가 52.3%로 가장 많았고 내과(17.5%), 가정의학과(8.3%), 이비인후과(5.5%), 외과(3.4%) 등이 뒤를 이었다.
이번 시범사업에선 왕진 1회당 최소 8만원, 최대 11만5000원의 진료 수가가 책정된다. 환자는 이 중 30%인 2만4000∼3만4500원만 부담하면 된다. 건강보험 재정의 불필요한 남용을 막기 위해 같은 건물로 왕진가거나, 한 세대에서 2명 이상 환자를 볼 땐 전체 수가의 50∼75%만 지급된다. 마비, 수술 직후, 말기질환, 의료기기 부착, 퇴행성 신경계질환, 욕창 및 궤양, 정신과질환, 인지장애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사업 참여의원에 왕진을 요청할 수 있다.
한국보다 앞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2015년부터 왕진 등 재택의료를 활성화하는 데 집중했다. 2017년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한 재택의료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가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진료와 간호를 받으면 의료비 지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에선 한 해 평균 1000만건의 진료행위가 환자의 자택에 이뤄지고 있으며 일본 내 전체 의원의 22.4%, 병원의 31.7%가 재택의료에 참여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의사 업무의 15%를 방문진료가 차지하며, 미국은 노인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어(Medicare)에서 방문진료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의협 등 의사단체는 시범사업 전 의료계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며 왕진 시범사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의협은 최근 성명서를 통해 “왕진서비스를 제공할 의료인들과 시범사업의 절차, 법적 책임, 수가 문제 등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범사업을 진행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낮게 책정된 수가에 대한 불만이 의사들의 집단 반발을 야기했다는 분석이 많다. 고병수 일차의료보건학회 회장은 “한 번 왕진을 나갔다 들어오는 데 빨라도 1~2시간, 거리가 멀면 더 긴 시간이 소요된다”며 “현재 책정된 수가로는 진찰비, 교통비, 진료 후 추가업무, 소모되는 각종 치료재료 등 기회비용을 빼고 나면 의원들에게 별다른 실익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게다가 한국은 의원급 의료기관의 90% 이상이 원장이 한 명인 단독개원 형태라 가만히 앉아 있으면 찾아오는 환자 진료를 마다하고 왕진을 나서기란 쉽지 않다”며 “미국과 프랑스처럼 왕진이 정착된 국가는 여러 명의 의사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 개원이 많아 왕진을 나가도 진료 공백이 생기지 않고 수익이 보전된다”고 설명했다.
왕진 시범사업이 오히려 1차 의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의사단체들은 복지부의 왕진수가 시범사업 계획안에 참여기관이 ‘의원’이 아니라 ‘의료기관’으로 규정돼 있어 시범사업 대상이 병원급으로 확대되면 또다른 환자쏠림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시범사업은 의원급으로 한정되며 병원급으로 확대할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왕진의사의 안전 문제도 대비가 필요하다. 대한개원의협의회 관계자는 “병·의원 안에서조차 의사에 대한 폭언·폭설 문제가 심각한데 환자 집에선 오죽하겠는가”라며 “왕진 가방에 진료 도구가 아닌 호신용 무기를 가지고 다녀야 할 판”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의료계 일각에선 의사단체들의 왕진 시범사업 반대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비뇨기과를 운영하는 L 원장은 “의사들이 근시안적 경제 논리에 매몰돼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며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변하고 의료기술은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데 딱히 대안도 없이 원격진료, 방문진료(왕진), 커뮤니티케어 등에 대해 무턱대고 반대만 하니 국민들의 신뢰를 잃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수가가 낮고 왕진 환경이 열악하다며 불만만 쏟아낼 게 아니라 정부, 시민단체와 협의를 통해 얻을 것은 얻고 새로운 변화는 받아들이는 대국적이고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범사업에 냉소적인 의사들과 달리 한의사들은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안병수 대한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한의학은 특정 질병이나 진료과에 국한되지 않는 통합적·전신적 개념의 치료라 고령자, 만성질환 환자에 대한 1차의료에 더 적합하다”며 “올 하반기 시범사업 대상에 한의사가 포함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