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난에 허덕이는 병·의원이 늘면서 개원의들을 회원으로 둔 의료단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열악해진 개원 환경, 젊은 의사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협회 운영진에 대한 불신 등 요인이 겹치면서 소속 회원들에 대한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어서다. 회원 장악력이 감소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회비납부율이 최근 몇 년 새 더욱 감소했고, 과거엔 관례처럼 여겨졌던 업무협조 요청이나 지시사항 등을 회원이 ‘갑질’로 인식해 반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회비납부율은 46.4%에 그쳤다. 특히 수도권 지역의 납부율이 저조했는데 서울시의사회는 35.4%, 경기도의사회는 34.4%로 최저 납부율을 기록했다. 의협 감사단 관계자는 “회비 납부와 면허신고제를 어떤 방법으로든 연계해 회비 납부회원과 미납회원 간의 차별을 둬야 한다”며 “미납회원에 대한 법적 조치를 강구하는 등 집행부가 원인 분석을 통한 회비납부의 적극적인 독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중소병원에서 근무하는 봉직의들의 회비납부율이 저조했다. 업계에 따르면 전체 봉직의의 5.7% 정도만 협회 회비를 납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봉직의는 근무지를 다른 지역으로 변경하거나, 병원을 새로 개원하는 등 근무환경이 유동적이라 회비 납부는커녕 회원 수 파악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대한한의사협회의 회비납부율도 2017년 기준 60.4%로 몇 년째 60%대에 머물고 있다. 한의협은 납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회원별 납부 금액을 안내하는 문자메시지를 발송하고, 지급명령신청 등 법적 절차까지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치과의사협회는 회비납부율이 75.3%로 비교적 높지만 이는 다른 단체보다 회비가 덜 비싸서라는 분석이 많다. 올해 기준 의료단체별 연회비 금액은 의협이 39만원, 한의협 50만원, 치협이 27만으로 책정돼 있다.
의료단체들의 공통적인 고민거리는 20~30대 젊은 의사들의 회비 납부와 협회 활동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이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어렵지만 유독 20~30대 회원의 회비납부율이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하는 게 사실”이라며 “개원 병·의원 간 경쟁 과열, 비급여 항목을 줄이고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넓인 ‘문재인케어’ 등의 영향으로 경영 사정이 악화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에서 정형외과 의원을 운영 중인 H 원장은 “당장 병원 운영만 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협회 일까지 신경 쓸 의사가 몇이나 되겠는가”라며 “같은 지역에서 10년 넘게 자리잡은 나도 이렇게 힘든데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거나, 봉직의로 월급을 받는 젊은 의사들의 고충은 더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중소병원에서 근무하는 봉직의 K 씨는 “의료환경이 전반적으로 팍팍해지면서 같은 의사를 동료보다 경쟁자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협회는 회원들의 요구엔 눈과 귀를 닫고 ‘어떻게 하면 회비를 더 걷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협회 소속 의사들이 협회의 요구나 지시사항에 반기를 드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소속 회원 치과의사들에게 치아 임플란트시술 최저수가를 강요하고, 이를 어긴 회원에겐 불이익을 준 충주시치과의사회에 시정 명령을 내렸다.
치과계에 따르면 충주시치과의사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기총회를 열고 보철치료나 임플란트시술비를 결정한 뒤 소속 병·의원에게 따르게 했다. 임플란트시술의 경우 최저수가를 2011년엔 150만원, 2014년엔 130만원으로 회원 병·의원에 통보하고 고객과의 전화상담 때 이를 고지토록 했다. 당시 유디치과 등 대형 네트워크치과들이 ‘반값 임플란트’를 표방하며 임플란트 시술비가 이미 80만~90만원대(2014년 기준)로 떨어진 상황에서 회원 치과의사들에게 폭리를 취하도록 강요한 셈이다. 특히 비급여 수가는 개별 의료기관이 자체 책정하는 것으로 의사단체 등이 강제할 근거가 없다. 임플란트시술은 대표적인 비급여 진료행위 중 하나로 현재 65세 이상 환자에게만 건강보험(본인부담률 30%)이 적용되고 있다.
충주시치과의사회는 통보한 최저 수가를 준수하지 않는 치과에 실명 공개, 회원사 제명 등 불이익을 줬다. 또 회칙에 해당 병원에 치위생학과 실습생 배정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어 채용도 방해했다. 온라인광고는 물론 버스광고 등 옥외광고도 막았다. 결국 참다 못한 회원 의사들이 충주시치과의사회를 고발하면서 협회의 보복 조치가 세상에 알려졌다. 충주시치과의사회는 ‘과도한 출혈경쟁을 막기 위해 이런 규정을 뒀다’고 소명했지만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개원의협의회 관계자는 “10년 전만해도 특정 이슈가 생기면 학회나 협회의 주도 아래 개별 의사들이 뭉쳐 한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이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 의사의 수가 늘고, 병원 살림이 각박해지면서 자신에게 약간의 불이익라도 생기면 ‘NO(아니오)’를 외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단체는 ‘협회가 갑’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나 젊은 의사들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