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건강을 최우선한다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여전히 수동적인 ‘뒷북’ 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경구피임약의 35세이상 흡연여성 사용금지와 도네페질 성분 치매약의 적응증 변경에 대한 대응이 느려 소비자보호를 소홀히 한다는 지적이다. 이미 서구에서 나온 의약품 안전에 대한 경고사항을 한참 뒤늦게 적응하거나 그마저도 미국 식품의약국(FDA) 조치가 나온 후 적잖은 기간을 끈 뒤에야 따라하기에 나선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식약처는 지난 3월 21일 35세 이상 흡연여성의 경구피임약 18품목에 대한 복용 금지(금기)와 관련해 ‘의약품 품목허가사항 변경지시 관련 의견 제출 요청’ 공문을 공지했다. 이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 3월 15일 안정성 관련 허가사항 변경(Drug Safety-related Labeling Changes, SrLC)에 여성 흡연자가 경구피임제를 복용할 경우 심각한 심혈관계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으며 나이와 흡연량 대비 혈전증 등이 증가할 수 있어 복용하지 못하도록 한 데 따른 조치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내용에 대해 정식 보도자료를 작성해 배포하지 않았다.
이 변경안에는 경고 항목에 ‘35세 이상 여성 흡연자는 투여해서는 안 된다(Contraindicated in women who are over 35 years of age and smoke)’는 문구가 추가되고 ‘선천성 또는 후천성 과응고병증 환자(Inherited or Acquired Hypercoagulopathies)’가 투여 금기에 새로 포함됐다.
허가사항 변경자료에는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에티닐에스트라디올(Ethinyl estradiol) 성분을 함유한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면 동맥 또는 정맥 혈전증 고위험군(A high risk of arterial or venous thrombotic diseases)에서 관련 질환 발병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체내에서 이들 성분이 ‘피떡’이라고 불리는 혈전 생성을 늘리는데 혈전이 과도하면 혈관이 막혀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다.
식약처는 당시 공지한 공문에서 의견수렴 기한을 지난 4월 14일까지로 설정했다. 이 기간엔 의약업계 유관단체와 경구피임약 제조사 등을 대상으로 허가사항 변경에 대한 입장을 수렴한다. 수렴한 내용에 대해 이견이 없으면 허가사항 변경지시 사전예고 절차를 거쳐 최종 적용된다.
하지만 식약처는 의견수렴 기한을 훌쩍 넘긴 지난 5월 21일 똑같은 의견 제출 공지를 다시 올렸다. 기존 공문에서 변경된 사항은 관련 의약품 품목이 18개에서 2개 더 추가된 것 외엔 없다. 추가된 제품은 지난 3월 13일 허가받은 동국제약 ‘릴리애정(성분명 데소게스트렐·에티닐에스트라디올, Desogestrel·Ethynylestradiol)’과 2012년 허가받은 바이엘코리아의 난포·황체 호르몬제 ‘클래라정(에스트라디올발레레이트, Estradiol Valerate)’으로 이들 제품은 첫 공지가 올라온 3월 21일 이전에 허가가 난 제품으로 딱히 추가될 만한 사유가 없었다.
이에 두 번째 공지에선 의견수렴 기한을 지난 6월 4일로 미뤘다. 이어 같은 달 28일 ‘의약품 품목허가사항 변경지시 사전예고 알림(복합경구피임제)’ 공지가 게재됐다. 이 문서에는 변경지시 예정일이 7월 14일로 나와 있는데 약 1개월의 유예기간이 부여돼 최종 시행일이 오는 8월 15일로 확정됐다.
만약 식약처가 빠뜨린 품목 2건을 추가하는 재공지 과정이 없었다면 이번 허가사항 변경은 이미 6월 중 적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늑장 행정으로 미국 FDA가 안전성 정보 변경을 공지한지 무려 150일이 지나서야 현장에서 적용하게 됐다.
미국 식품의약국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경구용피임약의 혈전색전증에 대한 위험성을 수차례 경고해왔다. 2012년 4월 10일엔 합성 프로게스테론의 일종인 드로스피레논(Drospirenone)이 프로게스틴보다 혈전 형성 위험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를 반영해 드로스피레논을 함유한 피임약엔 현재(아직 변경 이전 상태) 35세 이상 흡연 여성은 투여금기에 포함돼 있다. 드로스피레논·에티닐에스트라디올 복합제로는 바이엘코리아 ‘야즈정’과 ‘야스민정’ 등이 있다. 하지만 레보노르게스트렐, 에티닐에스트라디올의 동일 부작용에 대해선 유화적인 대응을 하다가 지난 3월에야 35세 이상 여성 흡연여성 전면 사용금지로 전환했다.
결론적으로는 이번 피임약 표시사항 변경 건은 FDA가 심각한(Serious)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표기된 사안임에도 5개월 이나 시행시기가 지연될 예정이다. 식약처는 무슨 연유인지 3월에 변변한 보도자료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정착오(2개 품목 추가 공고)로 최소 3개월가량 미국보다 시행시기가 늦춰졌다. 미국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경구피임약 전반에 대한 혈전색전증 발생 위험 경고가 나왔다면 역으로 한국이 미국보다 먼저 표시사항을 자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선도적 행정역량을 발휘할 자신감을 가질 필요도 있다.
식약처는 또 지난 6월 24일 느닷없이 치매치료제 ‘도네페질(donepezil)’을 ‘혈관성 치매’에 쓸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지난 7월 21일부터 혈관성 치매가 적응증 항목에서 삭제됐다. 2005년 이후 14년간 혈관성 치매로 약을 먹어온 환자들만 바보를 만들어버렸다. 치매가 인구고령화에 따라 핵심 질환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경구피임약 35세이상 흡연여성 사용금지와 마찬가지로 공식 발표나 보도자료 배포가 이뤄지지 않았다.
도네페질은 2000년 식약처가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승인한 뒤 2005년 혈관성 치매를 적응증에 추가했다. 약효 재평가 결과 혈관성 치매 증상개선에 대한 효능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게 이번 적응증 취소 이유다. 이에 도네페질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만 처방하게 됐다. 이 치료제의 원개발사인 에자이는 1996년 미국 FDA로부터 ‘알츠하이머성 치매’ 치료에 ‘아리셉트(도네페질, Donepezil)’를 허가받았으나 2002년, 2003년 미국과 유럽에서 혈관성 치매 적응증 확대에 실패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적응증 획득에 실패한 약물이 2005년 국내에서 승인을 받은 것은 식약처의 검증절차가 엉성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번에 인정했던 적응증을 번복해 삭제하려니 그 부실한 행정조치를 재삼 국민에게 확인해주는 셈이어서 보도자료 배포도 회피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식약처 관계자는 “임상 재평가에서 관련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서 적응증이 삭제된 것”이라며 “2005년 당시엔 심사 규정에 적합했기 때문에 허가해 줬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대한신경과의사회와 대한노인신경의학회는 공동으로 유일한 혈관성 치매 의약품이 대체약도 없이 사라졌다며 적응증 삭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 학회는 “국내 혈관성치매를 적응증으로 한 도네페질 임상에서 유의미힌 결과를 도출해오고 있다”며 “유일한 치료제인 도네페질 처방을 막은 것은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이번 임상 재평가에서 도네페질은 전반적 임상평가(CIBIC-plus)와 간이정신상태검사(MMSE)에서는 유의미한 개선사항을 입증했으나 인지기능평가검사(ADAS-cog)에서 효과를 보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의료계는 “3가지 중 2가지 평가지표가 개선됐는데 아예 적응증을 삭제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혈관성 치매로 도네페질을 처방받은 환자는 24만3875명에 이른다. 그러나 혈관성 치매 단독질환만으로 처방받는 환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대체로 알츠하이머병을 어느 정도 동반하고 있어 이 약의 혈관성 치매 관련 적응증 삭제로 인해 복용할 약이 없어진 환자는 예상보다 적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의사 재량으로 혈관성 치매환자가 비급여 처방 또는 알츠하이머병 추가 진단을 통해 우회처방을 받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가 치매질환 통계에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들 두 사례처럼 식약처의 늑장대응과 소신없는 행정은 환자 등 의료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이에 대해 식약처는 “허가사항 변경이나 임상 재평가로 인해 적응증이 삭제되는 사례는 자주 발생해 일일이 보도자료로 배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산 품목이 없어 의약품을 전량 수입하던 과거엔 FDA에서 승인받거나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의약품은 외국제약사의 자료를 그대로 믿고 수입허가를 내주던 게 관행이었다. 의약품이 없을 뿐더러 검증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다 의약분업 이후 웬만한 약은 국내 임상자료를 내거나 임상시험 표본이 큰 자료여야만 허가가 나오고 있다. 인허가는 꼼꼼히 챙기면서도 시판 후 의약품 안전관리는 소홀하다는 지적이다. 식약처가 미국 FDA의 변경사항 조치를 ‘복사뜨기’식으로 후속 이행만 할 게 아니라 국민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선제적으로 찾아내 대응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이다.
29개 신약을 개발하고 조 단위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는 등 한국 제약업계가 크게 성장했다.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수백억~수천억원의 임상시험 및 인허가 비용을 무릅쓰고 미국 FDA와 유럽의약품청(EMA) 허가에 도전하는 국내 업체들이 늘고 있다. FDA와 EMA는 수억~수십억원의 고비용이 들지만 그만큼 양질의 검증인력을 활용해 엄격하고 효율적인 심사 및 평가자료를 내놓는다. 반면 식약처가 허가해 수출까지 성사된 코오롱생명과학 골관절염치료제 신약 ‘인보사’는 허가취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최근 식약처가 심사인력을 350명에서 두 배 늘린다고 발표했는데 인력 증원에 부합하는 능동적 행정자세를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