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초기부터 다녔던 산부인과의원이 갑자기 다음주에 폐업한다고 하네요. 뱃속 아기를 덜컥 다른 의사에게 맡기자니 찜찜하고, 의사를 따라 병원을 옮기자니 거리가 너무 멀고 이래저래 난감합니다.”
출산율 저하, 낮은 분만수가 등이 장기화되면서 문을 닫는 산부인과 병·의원이 급격히 늘고 있다. 지방에 이어 수도권 분만 인프라마저 몇 년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올해 초 국내 대표 여성 전문병원인 제일병원이 이사진의 무리한 투자와 저출산으로 파산 위기에 몰려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인수 협상을 통해 기사회생을 노리고 있지만 채무액만 1400억원에 달하는 상황이라 인수 희망자를 찾기가 여의치 않다.
지난달엔 서울 강남권의 난임 진료를 선도했던 강남미즈메디병원이 진료를 중단하고 경영권을 임정애 산부인과로 넘겼다. 새로 취임한 임정애 대표원장은 난임·분만 진료 대신 질병 예방을 위한 유전체분석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다. 사실상 난임 영역에선 손을 떼겠다는 의미다. 미즈메디의 이같은 변신은 제일병원처럼 출산율 감소와 무관치 않다는 게 주변의 반응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매년 문을 문을 닫는 산부인과 수가 개소하는 산부인과를 앞서고 있다. 지난해 산부인과의원 45곳이 문을 열었지만 53곳은 폐업했다.
전국의 산부인과의원은 2013년 1397개소, 2014년 1366개소, 2015년 1352개소, 2016년 1338개소, 2017년 1319개소, 2018년 1311개소로 최근 6년새 꾸준히 감소했다. 관내에 산부인과가 한 곳도 없는 시·군·구가 50곳이 넘는다.
산부인과 중 분만이 가능한 곳의 수도 덩달아 감소하고 있다. 심평원 통계결과 2013년 전국에서 분만이 가능한 의료기관은 총 706곳이었지만 5년 후인 지난해에는 528곳으로 17.6% 줄었다. 분만 건수도 같은 기간 42만7888건에서 35만8285건으로 16.3% 감소했다.
지역별로 출산 가능한 의료기관이 가장 큰 비율로 감소한 곳은 전남 광주였다. 2013년 광주는 24개 의료기관에서 분만이 가능했지만 작년에는 절반인 12곳으로 줄었다.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 내 분만실도 많이 사라졌다. 최근 5년간 출산 가능한 산부인과가 서울에선 26곳, 경기도에선 30곳이 문을 닫았다.
산부인과 병·의원의 줄도산의 근본 원인은 낮은 의료수가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윤하 대한모체태아의학회 회장(전남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산부인과 병원이 사라지는 것은 저출산 영향도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의료수가 문제가 더 크다”며 “제왕절개 한 건을 위해 24시간 동안 의사·간호사 등 다수의 의료진이 매달리고 있지만 이에 대한 보상책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의원급 기준 초산 자연분만 의료수가는 53만4480원, 야간·공휴일 자연분만은 71만2640원, 응급 심야 자연분만은 106만8960원이다. 자연분만은 환자 본인부담금이 전액 면제된다.
초산 제왕절개는 수가는 43만 3620원, 야간·공휴일은 65만430원, 응급 심야 제왕절개술은 108만4040원으로 책정돼 있다. 환자는 전체 진료비의 5%만 부담하면 된다.
일부 산부인과들은 자구책으로 출산 장려 이벤트를 펼치기도 하지만 의료법상 환자유인행위에 해당돼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서울의 한 여성병원은 SNS 등을 통해 ‘자연분만 2박 3일에 5만원’, ‘제왕절개 4박5일에 19만원’이라는 파격이벤트를 진행했다가 관할 보건소로부터 시정 조치를 받았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점차 감소하는 것도 문제다. 배재만 한양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자 수는 15년간 65% 감소했다”며 “현재 산부인과 전문의의 절반 가까이가 50세 이상으로 머지않아 아기를 받을 의사가 없어 산모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저출산 극복을 외치면서 정작 거점 산부인과 육성에 소홀한 것은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